북부여北夫餘와 고구려高句麗와 동명성왕 추모鄒牟
타나토노트
2012-10-03 16:36:49 │ 조회 2756

‘주몽'이 아니라 ‘추모鄒牟’이다 




고구려高句麗를 건국한 시조始祖 동명성왕東明聖王 주몽朱蒙는 고대기록상 여러가지 이름으로 표기된다. 주물朱勿, 줌, 주무, 주몽朱蒙, 상해象解, 추몽鄒蒙, 중모中牟, 중모仲牟, 도모都慕 등이있는데, <국강상광개토호태왕비문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文>에 나타난 추모가 가장 올바른 이름이다. 추모왕을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 본기本記에서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고 했으나 동명은 ‘한몽’으로 읽을 것이니, 한몽은 신수두臣蘇塗, 즉 북부여 전설의 대제大帝 이름이며 성왕聖王은 ‘주무, 추모’를 의역한 것이다. <위서魏書>에는 추모를 ‘주몽’이라고 쓰고 주몽은 부여말에 ‘선사자善射者(활 잘 쏘는 자)’라고 풀이하며, <만주원류고滿州源流考>에는 지금 만주어에 선사자를 ‘탁림부아卓琳奔阿 혹은 주릴무얼’이라고 발음한다. 신라의 후예로서 청나라를 세운 청태조 누루하치를 애신각라 愛新覺羅라고 쓰는 것과 같다. 


그러나 광개토호태왕비문에는 ‘추모’라 적혀 있고 문무왕의 소召에도 중모中牟라 하여 주몽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주몽이란 이름은 중원사에 적힌 것을 신라문사들이 습용하여 고구려본기에 올리게 된 것으로, 추모와 중모는 ‘줌’과 ‘주무’로 읽은 것이니 이것은 조선어이며, 주몽은 순수하게는 ‘주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중원상의 주몽을 한자어로 쓴 것이니, 세어-만주족 선대의 말이며 한겨레에 가장 가까운 민족의 언어로 보는 <만주원류고>에서 말하는 주무가 비슷하나 <광개토호태왕비문>을 좇아 ‘추모’라 함이 가장 좋다.

 

九月王昇遐葬龍山號東明聖王

BC 19년 9월에 왕이 승하하여 용산에 장례를 치르고 동명성왕이라 한다.<삼국사기>

 

 

추모는 천부적으로 용기가 있고 힘이 세고 활솜씨가 뛰어났다. 그는 영리하게도 아사달의 단군왕검 이래의 신화를 이용하여 알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고구려를 건국했을 뿐만 아니라, 옛조선古朝鮮의 신앙을 받아 정신적으로 옛조선을 통일하며, 자신의 업적을 중원에 알렸으며, 제왕과 속민들이 숭배함에 이르렀고, 신라 문무대왕은 ‘남해渤海바다 만큼 전쟁을 치러 이기고 태백산 같은 덕을 쌓았다’는 찬사를 올렸으며, 중원 2천년 이래 유일한 공자의 반대자 동한東漢의 왕충王充이 그의 사적史籍을 기재하기에 이른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보면 BC 58년 태어나 BC 37년에 즉위했다고 하지만, 이는 다소 잘못된 연대라 믿을 수 없으며, 추모는 해모수解慕漱의 아들이며 BC 2백년경 원류 부여夫餘가 북부여와 동부여로 분리하던 시기에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 시기는 위만衛滿과 동일하다. 아리라(현재 송화강松花江) 근처에서 살던 왕 하백河伯은 유화柳花, 헌화萱花(선화라고도 기록됨), 위화葦花 세 딸을 두었고 모두 절세의 미인인데 그중 유화가 제일 뛰어났다. 하백을 '물의 신水神'이라고 한 것은 추모가 후에 왕위에 올라 자신의 혈통을 승화시키면서 외할아버지의 명예도 높인 것으로 보이는데, 하백은 원래 큰 어촌을 중심으로 무역과 어업을 크게 번성시킨 지역 군장으로 보는 것이 유력하다.


당시 부여왕 해모수解慕漱가 이 근처에 왔다가 우연히 아름다운 유화를 보고 사랑에 빠져 불장난을 저지른 후 임신케 한다. 왕실은 호족과 결혼하고 서민과 하지 않으므로 해모수는 그 뒤에 유화를 다시 찾지 않았다. 당시 서민들은 결혼후 남자가 여자의 부모를 위하여 처가에 데릴사위가 되어 3년간 머슴살이를 하고 나서 따로 독립가정이 된다.
유화의 불장난으로 임신한 것이 발각되자 아버지 하백이 크게 노하여 딸 유화를 잡아서 우발수優渤水(압록수鴨綠水로도 부르며, 현재 하얼빈 근처의 요하遙河로 추정된다)에 던져 버린다. 그러나 한 어부가 유화를 건져 동부여왕 금와金蛙에게 바친다. 금와왕은 유화의 미모에 반하여 후궁으로 들이는데, 곧 아이를 낳으니 해모수의 아들 추모이다.

 

유화부인이 금와왕에게 추모를 ‘햇빛을 보고 낳은 천신의 아들이며, 그 누구도 아이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금와왕은 이것을 믿지 않고 추모를 돼지에게 먹이라고 돼지우리에 넣기도 하고, 말발굽에 밟혀 죽게끔 길가에 던져보기도 하고, 산짐승들이 먹으라고 들판에 놔두기도 했으나, 우리에서 돼지가 추모를 피하고, 길에서 말이 추모를 피하고, 산에서 짐승들이 그 아기를 지키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유화부인에게 돌려주어 키우게 한다.

 

그가 성장하여 용기와 힘이 또래들보다 뛰어나며 활솜씨는 기묘하기 짝이 없었기에 ‘추모’라고 불렀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금와의 성은 해解씨이며, 금와왕는 유화의 사정을 듣고 그녀를 태후太后로 모셨고 왕궁에 거쳐하게 하였으며, 후에 그녀가 죽었을 때 왕후의 예로서 장사를 치렀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금와왕의 아버지 해부루解夫婁가 해모수解慕漱의 아들이라고 하며, <세종실록단군고기世宗實錄檀君古記>에는 해부루가 단군과 하백녀河伯女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고 적고 있다. 유교국가 조선의 입장에서 왕가상간王家相姦처럼 보이는 복잡한 가계도를 정리하는 의도에서 해모수와 해부루의 관계를 멀게 정리한 것이다.

 

해모수는 이미 가장 큰 원류 부여(북부여)의 시조이며 정복왕이다. 당시 전쟁을 통한 영토확장속에서 많은 부족장의 딸들을아내로 갖게 되어 많은 왕자를 두게 된다. 해모수의 성격도 거칠었으며 많은 왕자들의 사이에는 차기 왕권에 대한 권력다툼이 심하다. 해모수의 아들중 하나인 해부루는 영특하였지만 늦도록 아들이 없어서 고민하던 중, 곤연鯤淵에서 큰 돌 밑에 있는 아이를 얻어 이름을 금와라 짓고 태자로 삼는다. 그 뒤 재상宰相 아란불阿蘭弗의 권고에 따라 광폭한 아버지 해모수를 피하여 도읍을 동해에 가까운 가섭원迦葉原으로 옮기고 국호를 동부여라 한다. 죽은 후 금와가 왕위를 계승한다.


해부루는 태양왕 해모수의 성씨와 국가 부여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즉 해부여解夫餘의 의역이다. 해解씨는 태양을 이르는 말이며, 왕가의 위대함을 기리는 성씨이다. 즉 하늘과 태양을 의미한다. 이집트의 파라오, 중국의 천자, 태양왕 루이 14세, 일본의 천황 등 위대한 왕들의 모든 이름에 하늘과 태양을 상징함으로써 위대함과 권위를 높인 것이다. 아울러 고조선의 수도 아사달阿斯達에서 보듯, ‘아, 앗, 아사’의 뜻도 크고 높고 넓다는 의미와 아침이나 해를 말한다.

 

송화강의 옛 이름 ‘아리라’도 해를 맞는 넓고 큰 강을 의미하며 재상 아란불의 성씨 역시 왕가 혈통의 근친세력이었을 것이다.

 

금와왕은 7형제를 두었고, 큰아들이 대소帶素이다. 그는 추모의 재능과 용기를 시샘하여 부왕에게 고하여 추모를 죽이려 했지만 항상 유화부인의 주선으로 화를 면한다. 추모는 19세에 왕궁의 말을 기르게 되는데, 다 비대하게 먹이고 홀로 준마를 하나 골라 바늘을 혀에 넣어 여물을 먹지 못하게 하여 날로 수척하게 만든다. 금와왕이 모든 말이 튼튼해짐을 보고 추모의 공을 칭하고 수척한 말을 상으로 주었고 추모는 그제서야 아무도 모르게 말의 혀에서 바늘을 빼고 다시 먹여 키웠고, 북부여 전설의 영웅 신수두臣蘇塗를 기리는 신수두 10월대축제에 타고 나가 수렵에 참가한다. 금와왕은 그에게 겨우 화살 1대를 주었으나, 말은 잘 달리고 추모는 활을 잘 쏘아 대소의 7왕자의 수렵물보다 몇갑절 많았으니 대소가 이에 더욱 시샘하여 살해하려는 음모가 더욱 심하게 된다. 유화부인은 이것을 알고 아들 추모를 예禮씨와 결혼시켜 부여왕실을 안심시킨다.

 

예씨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예씨와 결혼하여 왕실을 안심시켰다는 것을 미루어 보아 부인 예씨는 동부여 왕실의 외척세력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신임세력의 여자이므로 여차하면 볼모로 잡아 추모를 옥죌 수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예씨가 아들 유리(유류)를 낳은 후, 평소 사귀던 호걸 오이, 마리, 협부 등 세 친구와 공모하여 비밀리에 어머니 유화에게 고별하고 처자를 버리고 도망한다. 추모는 오이, 마리, 협보와 함께 동부여를 떠나 대소가 보낸 암살자들의 추격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 엄리대수淹利大水에 이른다. 자신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큰 강를 향해 주몽은 ‘나는 천제의 손자이며, 하백의 외손外孫이다, 지금 나를 쫓는 자가 뒤를 따르니 그 위험이 급한 데 강을 건널 수 없으니 도와 달라’고 소리치자, 이에 감응한 자라와 물고기가 물 위로 떠올라 띠를 이어 다리를 만든다. 주몽이 무사히 강을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는 사라져 버렸고, 추격자들은 강을 건너지 못해 더 이상 쫓아오지 못한다. 역사는 이 사건을 가리켜 어별성교魚鼈成橋라 말한다. 마침내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니 추모 나이 22세이다.

 

동명성왕 추모와 동명왕은 다른 인물이다

 

삼국사기와 달리 <광개토호태왕비문>에는 시조 추모왕, 집안현에서 발견된 5세기경 모두루 묘지명에도 추모성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추모왕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세기경 편찬된 <논형論衡>에 있다. 

 

東明善射...東明走南...東明得渡...掩淲水...因都王夫餘 

동명은 활을 잘 쏘고, 남으로 도망하여 엄호수를 넘어 나라를 세우고 부여의 왕이 된다 <논형論衡 길험편吉驗編>

 

1922년 낙양에서 출토된 고구려 말 연개소문의 아들 천남성의 묘지명문에는 동명왕과 추모왕은 다른 사람으로 표기된다.

 

東明感氣踰㴲川而開國 동명은 기를 느끼고 사천을 넘어 나라를 연다

朱蒙孕日臨浿水而開都 주몽은 해를 품고 패수에 이르러 수도를 연다

<천남성묘명문泉男生廟名文> 

 


부여를 세운 건국시조가 바로 동명왕이다. 북이탁리국北夷橐離國에서 하늘의 기운을 타고 태어난 비범한 인물이다. 부여건국 신화에는 탁리국왕의 시녀가 하늘로부터 계란과 같은 기운으로 잉태하고 아들을 낳자, 괴이하게 여겨 왕이 아기를 마굿간에 넣지만 짐승들이 아이에게 입김을 불어 넣는다. 왕은 하늘님의 아들인 것을 알고 두려워하여 노비를 키우는데 동명이라 이름 짓고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쏜다. 왕위를 뺏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군사를 보내 동명을 죽이려 하자 그는 남쪽으로 도주하여 엄호수에 이르자 활로 물을 치자 물고기와 자라들이 다리를 만들어 강을 건너고 부여를 세운다.


부여의 시조 동명왕이 기원전 2세기경 이곳에 부여를 세운다. 부여 동명왕의 신화는 추모의 그것과 흡사하다. 현재 동명성왕 추모의 기록들은 12세기이후의 것들이다. 추모왕으로 불리다가 고려시대 이전 어느 순간부터 동명성왕으로 기록된다.

 

 

북부여는 한민족의 원류이다


원류 부여 즉 북부여의 정통성 계승을 위해 백제와 고구려가 경합한 듯 하다.고구려 건국 직후 한반도로 내려와 새로운 나라를 세운 온조왕의 백제 또한 부여의 정통성을 주장한다.

 

 

立東明王廟 동명왕의 묘를 세운다<삼국사기> 온조왕편

臣與高句麗源出夫餘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로부터 근원이 출발한다<삼국사기> 개로왕편

 

 

고구려의 대규모 침공으로 한성(한강)유역을 내어 주고 남부지역 내려간 백제가 마지막 수도 사비로 천도하면서 새롭게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라고 부른 것도 그런 맥락에 있는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의 원류는 부여이며, 한민족에게는 부여의 정통성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朱蒙自北夫餘逃難至卒本夫餘추모는 북부여로부터 도망하여 졸본부여에 이른다<삼국사기>

 

동명왕의 고향 북이탁리국北夷橐離國

 

북부여의 첫 수도로 추정되는 지린성吉林省 송화강 동쪽에 동단산성이 초기 부여산성으로 추정된다. 황토를 쌓아 올린 둥근 형태의 남성자성 유적은 부여왕성으로 보는데,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 三國志 東夷傳 夫餘調>에도 ‘성책은 모두 둥글어서 감옥과 같다’고 전한다. 즉 평지의 남성자성은 왕궁터이며 산위의 동단성은 군사요새일 것이다.

 


其國殷富自先世以來未焉破壞

그 나라는 매우 부강하여 선대 이래로 다른 나라에게 파괴된 적이 없다<삼국지> 동이전 부여조

 

인근에서 황금패식, 황금과 청동 장신구, 칠기, 동물문양 옥패식, 동차마구, 동복, 물항아리 등 수많은 청동기 부여 유물도 발견된다. 부여의 세력이 넓어서 부여의 유물은 요녕성에서도 발견된다. 송화강과 접한 동북부 평원에 세워진 부여는 교역의 중심지여서 인구가 8만호에 이르렀고 경제적 이익을 많이 취했고 군사적으로도 강했을 것이다. 초기 고구려도 3만호밖에 되지 않았다. 동옥저, 읍루를 장악한 부여는 고구려, 선비족과 함께 대륙의 3대 패자이다.

 

家家自有鎲伐

집집마다 철창을 갖고 있다<삼국지> 동이전 부여조

 

부여는 집집마다 철제 무기와 갑옷이 있을 정도로 막강한 철기과 부유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부여는 동북아시아 최대강국이다. 동북아시아의 대부분을 차지한 2,3세기 전성기 대소왕 시절에는 5만 군사로 유리왕의 고구려를 침공하기도 한다. 그러나 마침내 494년 고구려에 정복되며, 700여년 이어진 부여는 멸망한다. 지린성吉林省 유수현 노하심 유적에서 발견된 129기의 북부여 귀족 묘지터에서 황금장신구와 함께 찰갑과 철투구이 발굴된다.

 

 

이것은 북부여가 당시 철기무기의 대량생산이 가능하고, 기마병단의 존재를 가늠케하는 철기문화의 완성단계였다는 것을 반증한다. 지린성 북쪽 후유夫餘현은 부여의 옛 이름이 그대로 남아 있고 오래된 토성의 흔적도 남아 있다. 인근 송화강을 넘어가면 예로부터 한민족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흑룡강성 하얼빈이다. 지역 역사를 기록한 <흑룡강성정黑龍江省情> 첫장에 동명왕이 제1의 위인으로 적혀있다. 이 지역에서 최초의 나라를 세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哉國或西漢初人傳設中的夫餘建國者卽夫餘王

而該國是今我省內建立的最早的地方性政權動于宋嫩平原的槖離部族的成員  

동명왕은, 전설에 의하면 부여국을 건국했으니, 곧 부여왕이다. 현재 이 곳에서 세워진 최초의 지방 정권이다. 그는 송눈평원의 탁리부족의 구성원이다.<흑룡강성정 黑龍江省情>

 

국호國號 부여夫餘의 유래


현재 송눈평원으로 추정되는 흑룡강성 부유富裕현의 이름도 부여에서 발원한 것이다. 부여라는 이름은 오유이하烏裕尔河에서 출발한 북이국北離國, 즉 북이탁리국에서 발원한 것이다. 근처 생명의 젖줄이라고 할 수 있는 ‘오유이하烏裕尔河'란 강 이름을 비롯하여 생긴 이름 부여나 부유나 같은 맥락으로 본다.


그곳에 있는 금나라 태조 아골타阿骨打의 동상명문에도 '이 곳 부여대지夫餘大地에서 요나라를 치겠다'는 문구를 담고 있다.한반도 남쪽 김해 대성동 고분에서 농경중심지역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북방유목민족의 유물이 대량 출토되었다. 부여와 흡사한 동복銅鍑의 발견은 가야 기마철기민족도 부여로부터 이주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증거이다.

 

동명왕과 해모수는 같은 인물이다

 

졸본부여 부호 연타취발(혹은 연타발延陀勃)의 딸 소서노召西奴란 미인이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아 해부루왕의 서손庶孫 우태의 처가 되어 부류와 온조 두 아들을 낳았다. 그녀는 남편 우태가 죽어 과부가 되어 살고 있었는데 37살이었다. 두 번째 부인 소서노의 전前 남편 우태가 동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라 함은 졸본부여가 동부여의 연맹체이며, 우태가 해부루왕의 여러 후처중 한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해부루 역시 동부여국을 건설할 때 여러 지역부족장들의 딸들과 결혼하여 우태를 낳은 것이다. 그러나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는 ‘추모가 북부여의 6대 단군檀君 고무서高無胥의 둘째 딸 소서노를 부인으로 맞이하여 처가의 재물을 갖게 되어 영웅이 되었다’고 한다.

 

해모수도 북부여의 시조이며, 위에서 말한 동명왕도 북부여의 시조이다. 같은 인물이다. 중화인들의 시각에서 해모수를 찾아 적은 기록에는 해모수를 왕명으로 동명왕으로 적고 있는 것이며, 후에 서자庶子 추모는 고구려 건국이후 아버지와 같은 외로운 영웅의 여정을 거쳐 새로운 터전에서 왕국을 세웠기에 동명왕의 이름을 차용한 것이다. 우리의 시각에서 '해모수 동명왕'처럼 '추모 동명성왕'으로 기록한 것이다.


 

소서노는 북부여 단군 6대왕 고무서의 둘째딸이라고 적고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소서노의 아버지는 연타취발이라고 적혀 있다. 이미 당시 졸본부여의 왕은 송양이다. 그러니 연타취발은 왕일 수 없다. 연타취발도 무역과 교역으로 성공한 지역세력이라면, 당연히 북부여 해모수 왕가의 혈통을 물려받아 한 지역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추모의 가계도를 성역화하는 과정중에서 연씨 가문을 상승시키고, 연타취발에게 '고高씨' 성과 '무서無胥'라는 시호를 내린 듯 하다.


 

단군檀君이란 명칭은 ‘땅금 즉, 땅위의 어금니’, 왕이나 부족장 같은 최고 어른을 의미한다. 비록 소서노는 유리명왕의 즉위와 함께, 우태의 자식 온조와 비류를 데리고 한반도로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하고 사망하지만, 고구려의 첫 외가이며 명문가 연씨의 위세는 고구려의 마지막까지 이어진다. 연개소문淵蓋蘇文의 가문이 연타취발의 후손이다.

 

국호國號 고구려의 탄생


졸본부여의 명문 연씨 가문의 과부 소서노가 용맹스런 추모를 보고 서로 사랑하여 결혼하니, 추모는 연씨 가문의막대한 재산을 물려받고 명장 부분노扶芬奴 등과 연합하여 민심을 얻고 많은 부족들을 모아 걸분골의 산상(해발 800m 오녀산)에도읍을 세워 국호國號를 ‘가우리’라 하여 이두문자로 ‘구려句麗’라 쓴다. 가우리는 가온, 가운데이며 ‘가운데 도읍中京’ 혹 ‘가운데 나라中國’이란 뜻이다.


 

다른 설設은 추모가 소노, 관노(환노), 순노, 절노, 계루, 졸본(홀본), 예, 맥(막), 옥저, 부여 등 9개 부족을 통합하여 마침내 다물多勿(옛조선의 고토古土를 ‘회복回復’하는)정신을 내세워 옛조선의 정통성을 잇는 나라를 세웠고 옛 조선을 구성했던 9개의 구리족九夷族에서 ‘구려句麗’이란 나라이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원래이름은 가우리, 구리, 구려이다. 현재 중국어에서도 카우리, 쿠리 등으로 발음된다.

 


그러나 구려가 후에 국력이 커지고 자긍심이 커지자 ‘높고 위대한 구려, 즉 고구려高句麗’라고 나라이름을 끌어 올렸고 구려국의 왕가를 ‘高씨’라 칭했다는 설이 더욱 타당하다. 추모의 생부는 해모수이므로 당연히 ‘해추모’이며 동부여와
북부여의 왕족도 ‘해’씨였으므로, 고구려의 추모왕은 부여왕가의 더부살이에서 독립했음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성씨가 필요했을 것이다. ‘높을 고高’ 역시 태양과 하늘과 위대함을 내포한 고귀한 왕가의 성씨가 된 것이다.

 


졸본부여는 부류국, 비류국沸流國이다. 졸본부여의 왕 송양松讓과 활솜씨를 겨루어 그를 굴복시키고, 소서노 휘하의 명장부분노를 보내어 송양의 무기고를 탈취하여 마침내 BC 36년 졸본부여를 멸망시킨다. 청동기 말기에 아마도 송양은 철기제련기술을 가진 왕으로 생각된다. 그의 무기고에서 다량의 고급 철기 무기를 빼앗았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 후 부근의 호족들을 통합하고 보호하며 앞선 강철무기로 무장한 오이, 부분노 등을 보내어 BC 33년 태백산 동남의 행인국荇人國(현재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한런현桓仁縣으로 추정)을 멸하여 북쪽 산성에 도읍을 삼으니 그곳이 첫 수도 오녀산성五女山城이다. 오녀산성을 현재 홀한골성, 흘승골성紇升骨城이라 부르는 것도 즉 ‘홀본부여, 졸본부여의 중심이 되는 성’이라는 옛 소리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서기 3년 유리명왕 22년 국내성으로 천도하여 쌓은 환도성丸都城(위내암성尉那巖城)도 홀본성의 명칭을 승계한 것이다.고구려는 BC 28년 북옥저北沃沮를 멸망케 하고, 명장 부위위를 보내어 마침내 대소왕의 동부여를 쳐서 북가시라의 일부를 탈취하고 동부여와의 오랜 휴전을 가지는데 대소는 약해진 북부여를 거의 점령하지만, 대소가 죽은 뒤 북부여를 장악한 동부여마저 점령한다. 이로써 마침내 고구려의 기초基礎를 마련한다. 광개토호태왕비문에 ‘동부여는 예로부터 추모왕의 속민’이라고 적힌 것이 바로 이 사건을 의미한다.

 

옛 기록에 송양이 국호라 하였으나, 이규보의 <이상국집李相國集> 3권 동명왕편에 인용한 <구삼국사舊三國史>로 생각하면 ‘비류왕, 부류왕 송양’이라 하니 부류와 비류는 부여이며 졸본부여를 말하는 것이다. 송양은 국호가 아니라 졸본부여왕의 이름이다. 추모가 졸본부여 왕녀와 결혼하고 송양이 아들이 없으므로 붕어한 후, 왕위를 물려받았다고 하지만 틀린 말이다. 


송양의 딸을 맞은 것은 추모의 아들 유류儒留이다. 유류는 휘諱, 유리類利, 주류朱留로 기록되는 고구려 2대 유리명왕 琉璃明王이다. 추모는 소서노과 결혼하고, 후에 동부여국에서 탈출하여 찾아온 적자 유류는 송양의 딸과 결혼하여, 졸본부여의 왕실과 재벌의 양대 세력가문을 아내와 며느리로 맺어 고구려 건국초기의 인맥과 기반을 다진 것으로 보인다. 유리는 원래 ‘류리’이며 ‘누리’라는 의미이니, 아버지 추모왕에 이어 모든 땅을 다스리는 단군의 의미를 갖고 있다.

 

 

참고: <광개토호태왕비문해역>,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신채호 <조선상고사>, 이규보 <동국이상국집>, 김부식 <삼국사기>, 일연 <삼국유사>, <흑룡강성정>,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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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환국), 배달국, 고조선(단군조선)의 영토 개천절 (네이버백과사전)우리 민족의 시조 단군이 개국한 날을 기념하는 국경일.본문 10월 3일. 194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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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달국 커발환 한웅천황은 불교의 아미타불

    배달국커발환 한웅천황은 불교의 아미타불현재의 부처님을 모신 大雄殿(대웅전)은 거발환을 모신 桓雄殿(한웅전) 이다안창범 교수의 저서 『천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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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국 배달국 - KBS 역사스페셜 '제5의문명, 요하를 가다'

    드디어 역사유물로 드러나는'환국, 배달국, 고조선'의 인류시원역사최근 발굴되는 '요하문명'의 유물을 통하여 인류시원역사이자 한민족역사인 '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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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웅의 배달국 시대(18대, 1,564년)

    환웅의 배달국 시대(18대,1,565년)환웅의 대이동 환국말기인 약6천년 전 환국의 대이동 때, 평소 동방에서 원시생활을 하던 인간을 구제하고 싶은 꿈을 ...

    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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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달국의 후손, 천손민족(天孫民族)의 특징

    우리민족은 다른 민족과 다른 우리민족만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항상 일치하는 건 아니지만 전세계 유적지에서 아래와 같은 흔적이 보이고 있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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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주. 북중국 피라미드는 누가 만들었나?

    만주. 북중국 피라미드는 누가 만들었나?만주(滿洲). 북중국에 가면, 정체 불명의 피라미드들이 수 없이 서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것은 100개 이상이다....

    화이트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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