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수도는 어디였나?
화이트홀
2009-08-28 21:55:39 │ 조회 6461

 

제가 타고 온 마차 보기 어떻습니까? 말 두 마리가 끄는 쌍두마차인데 수레에는 옻칠을 했고 마차를 장식하는 이런 장식품들은 청동으로 만들었는데 금도금이 된 것도 있고 화려하죠. 수레중앙에는 햇빛을 가릴 수 있는 우산도 있답니다. 이 마차가 바로 고조선 사람들이 타고 다녔던 마차라고 합니다. 고조선의 귀족들은 대부분 이런 마차를 타고 수도 왕검성을 질주했을 거라 하던데요. 과연 정말 그랬을까요. 저는 고조선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단군신화입니다. 환웅이 인간 세상에 내려와 마늘과 쑥을 먹고 인간이 된 여자, 웅녀와 결혼해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단군이고 그 단군이 지금의 평양의 나라를 세웠는데 그 나라가 고조선이라는 이야기죠. 그렇다면 정말 단군이 세운 나라, 첫나라 고조선에 이런 화려한 쌍두마차가 길을 가득 메웠을까요. 하지만 고조선의 관한 기록은 너무나 적어서 단군이후에 어떻게 됐는지 또 그 후의 왕은 누구인지 하는 그런 기본적인 내용조차 알 수가 없는 형편입니다. 그러다 보니 영토에 있어서도 평양 주변에 있던 작은 나라였다. 아니다. 국경선이 중국북경근처까지 가는 거대한 영토를 가진 나라였다. 의견이 분분하고 자연히 수도역시 처음부터 평양이다. 아니다. 처음에는 중국 만주 일대에 수도가 있었다. 그런 주장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고조선은 대체 어떤 나라였을까요? 그럼 지금부터 우리의 첫나라 고조선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강변에 위치한 서울 동빙고동. 이곳에는 작은 마을 사당이 있다. 고려시대부터 존속했다고 전해지는 유서 깊은 곳이다. 이 사상은 마을 주민들의 손에 의해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주민들은 마을의 평안을 바라며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그 기원의 대상은 바로 단군이다. 첫나라 고조선을 건국한 시조 단군왕검. 요순시대를 연 중국의 전설상의 요임금이 존재하던 기원전 2333년. 단군왕검은 조선을 국호로 우리나라를 처음으로 개국한 것으로 전해진다.



음력 3월 15일. 사당에는 제사상이 차려지고 마을 노인들을 중심으로 준비가 시작된다. 단군에 대한 제사는 본래 정월 초하룻날 지내던 것을 단군 부인의 기일인 음력 3월 15일로 옮겼다고 마을 어른들은 전한다. 옛날과 달리 농사도 짓지 않고 마을의 공동 작업도 사라졌지만 사람들은 대를 이어 전승돼온 이 제사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마을과 집안의 화평을 국조단군에게 절하며 빌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첫 임금 단군에 대한 기억이 이곳 동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일까? 고조선은 이렇게 역사와 전설이 혼합된 채 남아 있다.


 

인터뷰/할아버지들


단군 할아버지 작은 할머니 모신 것 철거로 옆으로 이동했고 큰 할머니 제단이다. 큰 할머니 작은 할머니 두 분 모셨다. 단군 할머니는 두분인가? 그렇다. 어른들이 그렇게 알고 전했다. 영정은 오래됐는데 6.25때 도둑맞았다. 단군 할아버지 사당이 이태원에 있어 부군당으로 불렀다. 여기는 단군할머니 제단이다.



단군조선은 탄생과정부터 신화적 성격이 짙을 뿐만 아니라, 단군이 천오백년이나 나라를 다스렸다는 점과 아사달 같은 확인되지 않는 지명들로 인해 여전히 정식 역사속으로 편입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그런데 이중에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구체적인 지명 하나가 있다. 바로 단군왕검이 도읍으로 정했다는 서경, 즉 평양이다.



 

 



평양은 과연 고조선의 수도였을까. 고구려가 두 번째 수도로 삼을 정도로 평양은 고대 중요도시 중 하나였다. 또한 대동강 일대의 전승과 출토된 유물들은 이곳이 한때 고조선 수도였음을 말해준다. 한편 평양시 대박산 기슭에는 북한 학계가 단군릉을 발굴한 후 고구려양식으로 만든 거대한 왕릉이 있다. 남한 학계는 단군릉으로 무덤의 발굴결과 출토 유물이 고구려시기의 것으로 나타나 단군과 관계가 없는 무덤이었음이 밝혀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북한 학계는 무덤의 주인공은 바로 신화의 인물 단군이라고 주장한다.


무덤에서 출토되어 복원된 이 인골이 단군의 실제 유해라는 것이다. 전자상자성공ㅁ여법 검사결과 나온 인골의 사망연대는 5천년. 그러나 이 검사의 정확도에 문제가 제기되면서 단군과 고조선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미궁 속에 빠져 있다.

 

고조선이라는 국가의 명칭은 사실은 조선입니다.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서 옛날 조선이다. 그런 뜻으로 고조선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삼국유사를 보면 고조선은 지금의 평양에 수도왕검성을 세웠다고 합니다. 더욱이 평양일대에서는 수많은 고조선의 유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에 평양이 고조선의 수도였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고조선의 수도가 한반도를 벗어난 다른 곳에 있었을 것이다라는 추정도 만만치 않습니다. 지금도 학계에서는 그 문제로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그런 문제를 품게 한 결정적 단서가 바로 이 비파형동검입니다. 옛날 악기인 비파를 닮았다고 해서 비파형 동검이라고 부르는데요. 이 동검이 출토되는 지역이 바로 고조선의 영토다라고 말하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이 비파형동검은 한반도에서 뿐 아니라 중국만주일대에서도 출토되는데 문제는 수도 평양에서 보다 중국의 만주에서 더 많이 나온다는 점입니다. 이 비파형동검이 처음 사용된 것은 대체로 기원전 8C경, 그렇다면 혹시 그때 고조선의 수도는 평양이 아닌 중국만주 일대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비파형동검이 출토된 지역으로 가보겠습니다.

 

중국 대륙 동북쪽에 위치한 교통의 중심지 조양. 중국 역사상 한족과 북방 이민족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지역이다. 조양 일대에서 비파형동검이 발굴된 곳은 모두 60여 곳. 그중에서도 관심을 모은 곳이 12대영자유적이다. 12대영자 유적은 발굴 결과 기원전 8세기경 청동기 유적으로 확인됐다. 그런데 다양한 청동장식 유적들과 함께 고조선 대표유물 비파형동검이 발굴됐다.



오강원 박사 고구려 연구재단 연구위원


“이 비파형동검이 결국은 요동으로 확산되고 있는 1차적으로는 요동으로 확산된 것이 이어서 길림과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확산되고 이런 과정을 거친 다음에 나중에 여러 가지 문화적인 중간 지역을 거쳐서 세형동검 문화로 확대 발전됩니다.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고조선 내지는 고조선 문화를 얘기할 때 유독 비파형동검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기울이게 되는 것입니다.”


 

비파형 동검은 시기에 따라 크기와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비파형으로 이뤄진 검몸체와 검 손잡이, 검자루 맞추개 등 세 부분으로 나눠진다는 특징은 일정하게 유지된다. 검 손잡이 부분을 조립식으로 구성한 것이다.



“이 비파형동검은 다른 어떤 유물보다도 일단 주변의 다른 동검과는 달리 검심과 검손잡이를 따로 조립 제작해서 조립하게 돼 있다는 특징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제작습관을 고수한다는 자체가 굉장히 특별한 문화적인 정체성이 될 수가 있는 것이죠.”


 

기원전 8C 무렵 동아시아에서의 종족과 문화를 구별짓는 기준이 바로 청동검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초기부터 후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비파형동검이 출토된 조양은 고조선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그동안 조양 일대는 고조선이 아닌 북방 유목민족인 산융 동호의 본거지로 알려져 있었다.



서영수 교수 단국대 사학과


“처음에 이 지역의 비파형동검이 나왔을 때 그것을 유목민족인 동호의 것으로 본 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많은 학자 연구결과 이것은 예맥계 결국 고조선계 문화로 바꿨습니다. 그런 중요한 이유는 여기 대릉하 상류지역에 촌이 연결되는데 그쪽은 유목지역이지만 여기는 전부다 농업지역이고 비파형동검뿐이 아니라 여기서 나오는 같은 질그릇이라든지 이런 문화 갖춤 새가 장기간의 농업지역인 것을 증명했기 때문에 이것이 그 비파형 동검에 이른 문화가 유목민족의 것이 아니고 정착 농경민 바로 고조선 문화로 바뀐 것이죠.”



비파형동검은 만주일대 곳곳에서 확인된다. 심양 정가자와 유적. 이곳에서 청동부장품과 함께 비파형동검이 출토되었다. 고조선은 요서지역 조양에서 심양 요동지역 일대에 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파형 동검을 따라 가보면 서쪽으로는 요동벌판을 지나 멀리 내몽고 지역까지 갔다. 북쪽으로는 길림, 장춘지역까지 가게 됩니다. 그래서 중국 만주 전역이 고조선의 영토가 아닌가 이런 추정이 가능해 집니다. 또 여기를 보시면 평양지역 만주일대, 또 요서지역 이런데서 비파형 동검이 많이 나왔습니다. 이 세군대가 모두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비파형동검이 많이 나왔다고 그곳을 고조선의 수도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함부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무리 비파형동검이 고조선의 중요한 유물이라곤 하지만 유물한가지만 가지고 수도를 알 수는 없는 것이겠죠. 그리고 이것은 고조선 시기에 무덤으로 알려진 고인돌입니다. 물론 고인돌은 프랑스나 영국, 인도네시아 등에도 있지만 세계적으로 고인돌이 가장 많은 곳이 우리나라입니다. 이 고인돌이 중국에서는 만주지역에만 있고 다른 지역에는 거의 없습니다. 중요한 고인돌은 한반도와 만주지역에만 발견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인돌이 있는 곳을 찾아가면 초기 고조선의 도읍지를 만날 수 있을까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강화도 지역의 고인돌. 이곳 주민들은 대부분 덮개돌을 고임돌이 받치고 있는 북방식 즉, 탁자형 고인돌이다. 덮개돌이 땅위에 붙어 있는 남방 고인돌과 양식을 달리 한다. 이런 고인돌이 만들어진 시기는 대부분 청동기 시대이다.



하문식 교수 세종대 사학과


“고인돌을 발굴해 보면 실제로 고조선의 표지 유물이라고 이야기하는 비파형동검이나 미송리형 토기 이런 유물들이 직접 나오고 있습니다. 그 고인돌 무덤에서 그렇기 때문에 고조선 시기의 무덤이라고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고인돌에 대한 조사가 활발한 곳은 북한지역. 북한학계의 대대적인 조사에 따르면 대동강 유역에만 일만기가 넘는 고인돌이 존재한다고 한다. 특히 이런 고인돌에서 다양한 종류의 청동기부장품이 발굴돼 고조선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인터뷰 : 석광준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단군릉을 발굴하고 평양일대에서 고조선 관계의 유적들이 어떤 것인가, 그래서 집터와 무덤을 조직적으로 집중적으로 탐사한 결과 고인돌 무덤에서 비파형 창이 나오죠. 청동놋단검이 나오죠. 청동방울, 청동활촉, 막 드러납니다. 거의 고인돌 주민들이 살던 집터 자리에서도 비파형 창이 나옵니다. 남양유적에서도 나오고 평양시 주변지역 유적에서도 나오고 그러니까 고인돌 주민들이 살던 집터자리인 팽이그룹 집자리와 그 주민들이 묻힌 무덤인 고인돌 무덤은 이건 틀림없이 고조선 유적이라고 확증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고인돌과 고조선의 수도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학자들은 그 조성에 엄청난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대형고인돌에 주목한다. 사적 137호 강화 고인돌. 덮개돌의 길이가 6미터가 넘는다. 들판 한가운데 단독으로 서 있는 이런 대형고인돌에 묻힌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북한 학계는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조선중앙TV 프로그램


“평양일대에는 단군릉뿐만이 아니라 왕릉급의 특대형 고인돌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뚜껑돌 한 개의 무게만 해도 80톤 내지 120톤 이런 유형들의 무덤들은 고대사회에서 권력과 재부를 독차지한 권력자들의 무덤이었습니다.”


 

하문식 세종대 사학과 교수


“70톤 가까이 되는 고인돌을 축조하게 되면 노동력이 적어도 2000 이상이 소요됩니다. 그 2000명이 소요된다고 하는 것은 정치세력이 있지 않으면 주민들을 동원하기가 힘든 걸로 생각됩니다. 마찬가지로 은율 관산리 고인돌도 전체적으로 볼 때 1500내지 2000명이 동원되어야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북한학계에서는 은율 관산리 고인돌을 고조선의 왕의 무덤이라고까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에서 최대 크기를 자랑하는 관산리 고인돌이 위치한 곳은 역시 대동강 유역. 북한 학계는 이를 근거로 평양은 고조선의 수도일 뿐 아니라 청동기를 발전시킨 인류 문명의 발상지라고 주장하고 있다.



“고인돌의 축조된 시기나 고인돌의 규모면에서 볼 때 대동강 유역보다는 요동반도의 남단 쪽이 더 초기의 성격이 강합니다. 실제로 요동반도의 남단에서 발굴된 고인돌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보면, 비파형동검과 같은 청동기가 나온다든지, 또 고인돌에서 많은 노동력이 소요되기 때문에 그 축조의 규모로 볼 때 대동강 유역보다는 요동반도로 생각됩니다.”


 

요동반도에서 고인돌이 있다는 개주 석붕산으로 향했다. 중국말로 바로 고인돌을 가리키는데 석붕산 고인돌은 낮은 구릉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고인돌은 남한 지역 고인돌과 달리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도구를 이용해 잘 다듬은 흔적이 보인다. 뚜껑돌의 크기는 얼마나 될까. 확인결과 뚜껑돌의 길이는 8.6미터. 폭이 5.6미터. 요동반도와 한반도 전체를 통틀어 가장 정교하고 거대한 고인돌이다.



뚜껑돌을 받치고 있는 기둥 또한 내부에 제단이 들어갈 정도로 크고 잘 다듬은 돌을 사용하고 있어 마치 하나의 석조 건축물을 보는 듯하다. 이 고인돌의 위치는 야트막한 구릉지대. 주변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단독으로 서 있다.


 

서영수 교수


“이 고인돌의 경우는 우리나라 강화도에서 보는 고인돌과는 달리 정교하게 다듬었습니다. 대패질한 것처럼. 또 밑의 돌과 뚜껑돌이 만나는 지점의 경우도 아주 각을 잘 이루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이것은 특수 목적을 위해서 만들어진 그런 고인돌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고인돌은 대개 제사나 일종의 신전적인 기능을 하는 그런 고인돌이기 때문에 정교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지금도 마을 주민들은 고인돌을 찾아와 향을 피우고 소원을 빈다. 마을의 사당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고인돌 내부에는 어떤 시설을 한 흔적이 보이고 잦은 탁본으로 새까맣게 변한 상형문자가 있다. 중국 갑골문자와 비슷하나 같은 글자가 없어 정확한 뜻은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제사의식과 관계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후대에 누군가 그려 넣지 않았다면 이것은 고조선 최초의 문자일 가능성이 높다. 고대 상형 문자까지 새겨진 대형 고인돌. 이 고인돌은 고조선의 정치권력의 실체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인 셈이다.




개주뿐만이 아니다. 차로 50분 거리에 위치한 해성시에서도 대형고인돌이 있다 .주변마을과 평야지역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고인돌은 자리 잡고 있다. 웅장한 모습에 축조기술까지 뛰어난 요녕지역에서 손꼽히는 고인돌이다. 이 고인돌 역시 자연석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화강암의 표면을 가공해 매끈한 모습이다. 개주와 해성 일대에는 이 외에도 상당수의 대형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다.



하문식 교수


“고인돌을 통한 초기 고조선 정치체는 일차적으로 요동지역이 될 수가 있습니다. 요동지역 가운데서도 요동반도의 남단을 이야기 할 수 있구요. 그 요동반도의 남단에는 이른 시기의 고인돌과 더불어서 아주 대형고인돌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대동강유역 황해도 지역에서 정치체가 만든 고인돌이라고 볼 수 있는 대형고인돌들이 있습니다.”



권력자 무덤이 있는 곳은 곧 그 나라의 중심지. 대형고인돌은 한반도가 아닌 요동반도지역을 주목하게 한다.



노태돈 교수 서울대 사학과


“고조선이 중심지로 설정할 수 있는 곳으로서는 지금의 평양지역보다는 오히려 요하와 동쪽의 요동 쪽이 찾는 곳으로 보는 것이 올바르다 생각되어지고 또 구체적인 위치가 어딘가 하는 문제는 탁자형 고인돌 무덤이 보다 많이 분포하고 있는 지역 즉 지금의 요양 이남쪽 지역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치집단의 흔적으로 보이는 대형고인돌은 주로 요양아래의 요동반도에 집중분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지역이 고인돌 시기의 고조선의 중심이었을 가능성은 상당히 놓은 것이다.




한반도와 만주일대를 보여주는 위성지도인데요. 고인돌이 어떻게 분포하는지 보겠습니다. 탁자형 고인돌 분포지역입니다. 현재 이 고인돌 분포 지역이 고조선의 영토였다라는 것은 이견이 없습니다. 물론 여기 산둥반도에 있는 이런 고인돌들은 고조선 사람들이 여기서 건너가 살면서 생긴 것이라고 합니다. 그럼 여기서 작고 볼품없는 고인돌들은 제외하고 거대한 대형고인돌들이 있는 곳만 표시해 보겠습니다. 대형고인돌이 있는 곳은 바로 이 두 지역 요동반도와 북한의 평양일대입니다. 그런데 이 두 곳에 고인돌도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어느 쪽이 더 멋져 보입니까. 요동반도의 고인돌은 북한지역의 고인돌보다 인공적으로 더 잘 다듬어져 있습니다. 중국학계에서는 이런 고인돌들이 기원전 10C 이전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기원전 10C이면 철기가 나오기 전인데 무슨 도구를 사용해서 저렇게 돌을 매끈하게 다듬었는지 궁금하군요. 요동에 있는 고인돌은 평양에 있는 고인돌보다 만든 시기도 빠르면서 더 세련된 모습입니다. 이런 이유로 요동반도에 고조선의 초기 수도가 있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것이죠. 정말 그런 것인지 중국역사서에 나오는 고조선 관련 기록을 샅샅이 검토해 보기로 했습니다.



고조선에 관한 기록이 실린 중국문헌들이다. 기원전 7세기 상황을 적은 <관자>에서부터 고조선이 등장한다. 그러나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문헌은 사마천이 쓴 <사기>다. 고조선이 멸망한 직후에 쓰여진 당대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인터뷰/서영수 교수


“이 고조선의 수도가 요동지역에 있었다는 전승이 중국 측 기록에 있습니다. 왜 그런 것을 알 수 있느냐면 그 사이 조선열전을 주석한 장한 같은 곳을 보면 바로 조선이라 하는 지역은 삼수와 합해지는 큰 강 세 개가 합해지는 그런 지역이다. 거기서부터 그 명칭이 유래되었다라든지 그러나 오늘날 대동강으로 보면 그런 입지조건이 안 맞습니다. 요하로 보면 그런 입지조건이 맞는데 또 응서의 주석도 보면 바로 조선왕의 옛도읍이라든지 또는 조선왕만에 도읍이라든지 이런 전승들이 있는데 조금 더 시대를 후한대 이후로 내려가 보면 그런 전승들이 중국 측에서 끊깁니다. ”




<사기>에 의하면 요동에는 험독현이란 곳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조선왕의 구 도읍지, 즉 고조선의 옛 수도라고 한다. 이런 내용은 <한서지리지>에서도 확인됐다. 험독. 이것은 평양시기 이전, 고조선의 또 다른 수도가 있었던 곳이다. 고조선 수도는 이 험독현 지역 안에 있게 된다. 험독의 위치는 과연 어디였을까. 요하 일대 옛 요동군으로 향했다.


태안시 신개하구. 요하를 건너 바로 서쪽에 위치한 태안시지역. 이곳은 중국 학자들이 험독이라 추정하는 곳이다. 너른 벌판에 토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바로 손성자성이다.


 

이더밍/ 손성자 마을 주민


“고구려성, 고구려성이라 불렀다. 노인들이 고구려성이라고 불렀어.


왜 고구려성이라고 부르죠?


원래 여기 조선인이 살았거든


언제 발견되었어요?


오래전에... 원래는 아주 높았다고... 애들이 올라가서 놀고 그랬어.


 

주민들이 고구려성이라 부르는 손성자성. 중국학계는 험독현의 옛성 중의 하나로 보고 있다. 지금도 성터에서는 기와 조각과 전돌 등이 쉽게 발견된다. 그런데 이 기와는 대부분 한나라 기와와 고구려 기와. 고조선과 관련된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인터뷰/서영수 교수


“여기가 고조선의 중심수도라고 보기엔 조금 어렵겠습니다. 그러니까 수도는 더 서쪽에 가야 될 텐데 단서가 여기에 있는 것이죠. 그리고 고조선의 경우도 후대의 전략적 요충지라고 하는 것은 고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조선도 서쪽 중원세력들과 끊임없이 투쟁을 하였기 때문에 여기가 요하를 바로 건너자마자 가장 높은 구릉에 위치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고조선시대에도 중요한 군사적 거점이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중국학자들이 험독으로 지목한 이곳이 고조선의 수도가 아니라면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그 중심 도성은 제 개인적은 생각입니다만 요하이동 천산이서에 어디쯤일까로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 당시에 문헌기록을 검토해보면 그쪽지역에 고조선 중심이 있어야지 기록이 타당성 있기 때문에 위치로 보더라도 천산산맥이 요동벌판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도성을 쌓으려면 바로 배후에 산이 있어야 하고 앞에 강이 있어야 하고 평야가 있어야 하고 또 적군을 막을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바로 요하이동 천산이서의 그 사이에 저희가 고고학적인 조사를 많이 하면은 그 당시에 수도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만, 다만 현재 그런 지역들이 다 대도시화 돼가지고 정말 어려움점이 있습니다.”



요하를 건너 동쪽으로 펼쳐진 지역. 이곳은 바로 대형고인돌이 있던 개주 해성 일대다. 북한학계의 주장에 따르면 부수도, 즉 제2의 도시가 개주시 일대에 있다고 한다. 신채호의 <조선사 연구초>에는 해성 부근이 고평양, 즉 고조선의 옛 수도라고 지목하고 있다. 요동 평원의 동쪽 끝에서 너른 요동평을 바라보며 자리한 도시 해성. 그리고 해성 바로 밑에 있는 개주. 이 두 도시는 모두 요하를 서쪽의 자연방어선으로 삼고 있다.


 

또한 뒤쪽으로는 천산산맥이 둘러싸고 있다. 앞쪽의 요하를 자연 해자로 삼고, 뒤에는 높은 산에 의지한 최상의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지금 해성과 개주는 현대적 도시화가 진행돼 이곳이 옛 요동군 험독이었다는 증거는 찾을 길이 없다. 광활한 요동벌판을 앞에 두고 뒤고 천산산맥의 험준한 지세에 의지한 이곳이 정말 고조선의 수도가 있던 곳일까?





청나라 초기 지리지인 독사방여기요. 고조선의 수도가 있었다는 험독의 위치를 찾기 위해 다시 중국 문헌을 검토하던 이 책에서 또 다른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험독의 경계가 삼차하에 있다는 것이다. 삼차하는 세 강이 교차한다고 해서 나온 이름이다. 그렇다면 삼차하는 어디일까. 현대의 중국 지도를 보면 삼차하는 혼하와 태자하, 요하가 만나는 지점이다.






 

요동벌판 한가운데를 흐르는 요하의 물길에 혼하와 태자하가 합류하게 된다. 세 강이 만나는 지점은 요하 하류 일대. 만주일대의 지리를 서술한 성경통지에서 좀더 구체적인 위치가 확인되었다. 삼차하는 세 강이 만나는 지점에서 바다까지, 이 일대 전체를 가리킨다. 따라서 삼차하를 경계로 삼은 험독은 바로 이곳, 대요하 유역. 놀랍게도 해성과 개주 지역이었다. 첫나라 고조선, 고조선의 영토는 한반도만이 아니었다. 요동의 개주 해성 일대에 수도를 두고 요동벌판과 요서지역까지 지배했던 것이다.







고조선은 기원전 8C경부터 비파형동검을 사용하다가 점차 세형동검으로 변해갑니다. 이게 세형동검인데요. 비파형동검에 넓적하던 날이 더욱 예리하게 바뀐 것이죠. 그런데 세형동검이 주로 출토된 지역은 보시는 것처럼 바로 북한의 평양일대입니다. 만주일대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는 기원전 3C경 요하하구를 중심으로 해성, 개주 그 주변에 수도를 세우고 번성하던 고조선에 뭔가 큰일이 벌어진 것이 분명합니다. 당시 국제사정은 어떠했는지 살펴봐야겠습니다. 이때 중국은 춘추전국시대였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강성한 일곱 개의 나라 즉 전국 7웅이 서로 전쟁을 벌이던 전국시대입니다. 이곳은 공자가 살았던 노나라 그리고 제나라 그리고 나중에 중원을 통일한 진시황이 등장하는 진나라입니다. 이중 고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곳은 지금의 북경의 수도를 두고 있던 연나라입니다. 이건 당시에 연나라 유물들인데 이런 청동제기들은 제사를 지낼 때 쓰던 것들이구요. 이쪽 유물들은 바로 연나라의 무기입니다. 사실 이때 중국에서는 이미 철기가 사용되고 있었는데 무기는 여전히 청동기였습니다. 고조선의 세형동검이 등장하기 시작할 때 연나라에서는 이런 칼로 전쟁을 했습니다. 중원의 패권을 놓고 하루가 멀다 하고 전쟁을 벌이던 연나라. 그 연나라가 피해갈 수 없었던 한판 승부 그것이 바로 고조선이었습니다.



전국시대인 기원전 4세기말. 중원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연나라가 전국 7웅중 하나인 제나라를 침공해 70개성을 빼앗으며 중원의 강자로 급부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형구 교수 선문대 사학과


“기원전 4C경에 그 당시 동북아시아 질서를 보면 중국의 여러 제후국과 마찬가지로 조선도 상당히 강했다고 봅니다. 상상을 하지 못할 정도로 강했던 조선이라고 저는 봅니다. 역사서에 보면 그 중국 삼국지 동이전 한전에 나오는 데로 중국의 전국시대에 5호국이 조나라, 연나라, 제나라, 중산구, 한나라 이 5호국이 서로가 상황을 하니까 조선도 왕을 칭했다고 하거든요.”



 

당시의 사정은 위략에 자세하게 기록돼있다. 연나라가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지 고조선 역시 독자적인 왕국임을 천명한다. 더욱이 이에 그치지 않고 연나라를 침공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인터뷰/서영수 교수


“이 고조선이 처음에는 전국층이 연나라보다 조금 더 강성했던 것 같아요. 위략이라는 기록에 보면 먼저 연나라를 치려고 했는데 대불예가 말려가지고 치지 않았다는 이런 얘기가 있는데 당시 연나라가 전국 7웅 중에서는 5번째나 6번째 쯤 되는 나라지만은 실지로 강병 30만을 동원할 수 있는 큰 나라인데 그런 나라가 비등한 그 상태에 있었어요.”










고조선이 선제공격하려 했던 연나라. 기원전 11세기부터 연나라는 수도를 지금의 북경에 두고 있었다. 당시의 연나라 수도 이름은 계성. 지금도 그 성문, 즉 계문 자리가 북경에 남아 있다. 3천년에 이미 대규모 성문을 갖춘 도성이었다. 연나라의 국력은 북경 아래 연 하도를 새로 건설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그때가 기원전 4세기말. 연 하도는 거대한 외곽 성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비록 흙으로 만든 토성이지만 판축기법을 사용해 마치 벽돌을 쌓은 것같이 견고하다. 이곳에선 수만은 당시 유적이 발굴됐는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이 거대한 청동문고리이다. 이 청동문고리는 당시 연나라 도성의 성문이 얼마나 거대했는지 짐작케 한다.


 

또한 연나라만의 독특한 문양을 새겨 넣은 기와가 다량 출토돼 도성 안에 기와집의 존재를 입증해준다. 철제농기구를 바탕으로 생산력이 크게 발전했던 기원전 4세기. 왕위에 오른 연나라 소왕은 드디어 본격적인 고조선에 대한 응징을 계획하게 된다. 제나라를 제압하고 힘을 키운 연나라의 소왕은 기원전 300년 무렵, 장수 진개를 앞세워 드디어 고조선을 응징하게 된다.


 

인터뷰/선문대 이형구 교수


“연나라 장수 진개라고 하는 사람이 연장진개가 조선을 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이른 시기에 가장 큰 전쟁이었을 겁니다. 우린 지금 연 소왕 때에 진개 동본이 조선정벌을 거의 모르고 있는데 우리 역사상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연나라 장수 진개가 먼저 택한 상대는 북방의 동호. 역사서는 연나라가 동호를 1000리 바깥으로 내몰았다고 한다. 지금도 그 흔적은 남아 있다. 동호와의 1차 전쟁에서 승리한 연나라는 그 자리에 대규모 장성을 쌓게 된다. 그러나 지금은 성벽이라고 보기도 힘든 흙더미와 돌무더기만 희미하게 남아 있다.



인터뷰/서영수 교수


“진개가 동호를 천리 밖으로 물리쳤다. 그러면서 군을 설치하고 쭉 장성을 쌓는데 바로 이것이 그 유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비교적 지금 남아 있다.”


 

연나라가 이 지역에 장성을 쌓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동호의 재침략을 막아 다음 전쟁에서 총력전을 펼치기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



인터뷰/서영수


“어떻게 보면 조선을 치기위해서 그 후방의 동호를 먼저 치고 왜냐하면 이 막북지역은 큰 생산량이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요서요동의 넓은 평야를 치는 것이 연나라의 주목적이었으니까 그 전에 동호를 먼저 치기 위해서 치고 주력 조선을 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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