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세기 저자 행촌 이암(杏村 李嵓)의 역사적 역할
타나토노트
2012-09-20 13:39:35 │ 조회 847

고려 말 행촌 이암(杏村 李嵓)의 역사적 역할


[출처] 우리역사의비밀 2012-08-08 관리자


충숙왕 10년(1323) 27세 때에는 심양왕, 도첨의 정승 유청신(柳靑臣), 첨의 찬성사 오잠(吳潛) 등이 원 황제에게 청한 “국호폐지입성책동(國號廢止立省策動)”을 반대하는 소를 올렸는데 그의 소략에서 행촌의 자주ㆍ자립ㆍ자강의 기백과 포부와 의지를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단군 이래 천제의 아들로 제천을 행함으로 현재 분봉 받은 제후와는 근본이 서로 같지 않다. 국계(國界)를 허물지 말고 고유민속을 섞지 말라. 이미 고유의 기혼과 혈육이 있어서 한 근원의 조상을 갖게 되었으니, 이제 곧 신시개천(神市開天)으로부터 이를 삼한관경(三韓管境)으로 하고, 크고 이름난 나라를 하늘 아래 만세에 만들었기 때문에… 군신이 자주ㆍ자강의 정책을 세우고 있는 이유이다.”

 

(중략) 

 

얼마나 기막힌 사연인가? 행촌 이암 선생은 고려말 공민왕때 국무총리직에 계시던 분이다. 여기서 언급된 단군은 무엇이고 신시개천은 무엇인가? 아직도 단군이 신화라 헛소리 해대는 매식자들은 이제 천벌을 부여하여 씨를 말리자...


- 운영자ㆍ관리자 -

 



 

주요 활동내용


- 1297. 4. 15 : 출생  

- 1313 : 충선왕 5년 17세의 나이로 문과급제  

- 1330 : 충숙왕 17년 동지공거 (同知貢擧, 고시위원)

- 1341 : 충혜왕 2년 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주관함 (知貢擧, 고시위원장)

- 1347 : 충목왕 3년 우대언 (右代言, 대통령 비서실장)

-1358 : 공민왕 7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국무총리), 서북면병마도원수(西北面兵馬都元帥, 참모총장), 홍건적 4만 격퇴  

-1363 : 공민왕 13년 10월 3일 강화도 해운당에서 단군세기를 집필  

- 1364 : 공민왕 14년 5월 2일 돌아가심 (향년 68세)  


 주요저서

저서로는 행촌 3서가 있는데 ‘단군세기, 태백진훈, 농상집요’이다. 정본 한단고기에 ‘단군세기’가 포함되어있다.


* 단군세기 : 47대 2096년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  


* 태백진훈 : 도학심법서  


* 농상집요 : 경세실무서(농업의 종합계획서)  


고려 말 행촌 이암의 역사적 역할

고려 말 행촌 이암(1297(충렬왕 23)~1364(공민왕 13)은 고려의 혼란기에 역사적 역할 이 지대했던 인물이다.


 첫째, 원의 세조가 원과 고려의 통합을 원했을 때 이암은 종족의 개별성을 존중한다는 정책을 주장하여 원과의 통합을 반대하였다.

 

충숙왕 10년(1323) 27세 때에는 심양왕, 도첨의 정승 유청신(柳靑臣), 첨의 찬성사 오잠(吳潛) 등이 원 황제에게 청한 “국호폐지입성책동(國號廢止立省策動)”을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


 “우리나라는 단군 이래 천제의 아들로 제천을 행함으로 현재 분봉 받은 제후와는 근본이 서로 같지 않다. 국계(國界)를 허물지 말고 고유민속을 섞지 말라. 이미 고유의 기혼과 혈육이 있어서 한 근원의 조상을 갖게 되었으니, 이제 곧 신시개천(神市開天)으로부터 이를 삼한관경(三韓管境)으로 하고, 크고 이름난 나라를 하늘 아래 만세에 만들었기 때문에… 군신이 자주ㆍ자강의 정책을 세우고 있는 이유이다.”

 

둘째, 환단고기(이유립공개), 단군세기(단군고기/삼성기, 단군세기(이암), 북부여기, 태백일사(이맥)) 등의 저술을 통하여 한민족의 역사적 원류를 밝히려 노력하였다.

 

“나라를 위하는 길(爲國之道)은 사기(士氣)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고, 사학(史學)보다 급한 것이 없음은 무엇 때문인가? 사학이 분명하지 못하면 사기를 진작시킬 수 없고, 사기가 진작되지 못하면 국가의 근본이 흔들리며 나라를 다스리는 법도가 분열됨이라.(爲國之道 莫先於士氣 莫急於史學 何也 史學 不明則士氣 不振 士氣 不振則國本 搖矣 政法 岐矣)”


 셋째, 1349년 원으로 부터 비서인 〈농상집요(農桑輯要)〉를 구해다가 보급시켜 고려의 농업기술발달에 공헌하여 농업생산혁명을 가져왔다.


 넷째, 국교인 불교의 퇴폐성을 지적하고 새로운 국가통치이념인 주자성리학에 바탕을 둔 정치 실현이었다.


 다섯째, 조맹부체의 일가를 통하여 서체문화의 변혁을 가져왔다. 조맹부체의 유행은 조선 500년의 서사(書寫)문화의 맥을 형성하였다.


 [행촌 이암의 서체]



1. 머리말  

고려 말은 대몽 항쟁기를 지나 원의 간섭이 진행되는 동안 신흥유신에 의한 개혁기에 해당된다. 이런 개혁은 성리학의 수용과 궤를 같이 하며 문화의 수용 또한 상관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원과의 잦은 왕래 속에서 서책의 유입도 많아졌고, 이런 서책의 구입은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졌으며 이런 과정에서 새로운 문물을 접하게 되었다. 새로 수용된 문화는 개혁의 주체세력, 즉 신흥유신사이에서 유행하였다. 이런 유풍은 조선 개국과 함께 조선 초기에 꽃을 피워 안평대군을 낳았다.


 고려 말 원의 문화 수용 초기, 특히 글씨의 경우 과거시험 과정에서 스승의 직접적인 지도와 교본으로 사용하던 서첩에 의한 영향이 지배적이었다. 


 

고려 말 조맹부체가 수용되어 행촌 이암이 배출되기 까지 당시 원과의 관계와 그에 따른 문화수용의 양상이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문화의 수용 후 어떻게 발전하였는가를 송설 조맹부와 행촌 이암의 서체를 비교하여 고찰해 보기로 하였다.


 

행촌 이암의 경우 원을 자주 드나들었던 인물이 아닌 점을 감안하여, 원을 자주 왕래하였던 당시의 주변 인물과 과거시험 준비 과정에서 그에게 도움을 주었을 법한 인물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조맹부의 글씨와 비교하면서 과연 어떤 점이 조맹부의 필법과 같은 점이고 다른 점이 무엇인지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이런 연구를 통하여 이암서체의 특장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2. 조맹부체의 수용  


1) 고려 말 문화수용과 관련된 사항  


(1) 정치문화  


12세기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했을 때 문인들이 배척되어 점차 활기를 잃은 문학, 예술 전반에 걸쳐 큰 쇠퇴가 일어났으며 서예의 경우도 그 예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러한 사정은 고종 말기에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고려가 원과 교섭할 때까지 계속된다.


 원은 충렬왕 2년(1276)에 물산이 풍부한 강남지역의 남송이 원에 점령되면서부터 고려에 대한 경제 수탈이 줄고 대 고려 정책이 경제적 침탈보다는 정치적 또는 군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으며, 당시 경제 전문가였고, 남송에 대하여 잘 아는 조맹부는 세조의 정치자문 역할을 하였다.


 고려 말기에는 정치적으로 원과의 밀접한 관계로, 고려 측에서는 왕 스스로 원의 수도를 빈번하게 왕래함은 물론 장기간에 걸쳐 체류한 적도 많았고 사절과 왕의 수행원으로 연경을 자주 출입하였다. 이를 통해서 원의 학자나 관료들의 교류가 거듭되어 고려 말기 한문학은 눈부신 발전을 이루고 서예에도 큰 진전을 보였으며 게다가 고려 후기의 긴밀한 대원관계는 이 시대 지배세력으로서의 권문세족의 존재 양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고려는 무신 정변 이후 종래의 귀족 중심의 문화가 큰 동요를 일으키면서 그 기반마저 동요되고 있었다. 게다가 외적으로 몽고의 침략과 간섭을 받게 되어 고려 문화는 기반에서부터 해체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이 같은 사회적인 시련과 문화적 갈등을 겪으면서 지방에서 성장한 신진 지식층은 기존의 지배 계층인 보수적 권문세족에 대항하여 전면적인 사회개혁과 문화혁신을 주장하게 되었다. 즉 정치 사회적 지배세력으로서 권문세족이 존재하였고, 다른 한쪽에서는 사대부가 성장하여 권문세족과 대립한 끝에 결국 개혁을 달성하고 조선 건국에 이르렀다.

 

특히 정방(政房)을 통해 진출한 신진 관인들은 신돈(辛旽)의 개혁을 계기로 ‘신진문신세력’이라는 정치세력으로 대두하였으며, 고려 후기 농업생산력의 발달과 그에 따른 사회변동이 사대부가 성장할 수 있는 사회 경제적 배경이 되었다.

 

이때 원을 통해서 전래된 성리학은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신진 지식층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으며, 이후 고려 말 조선 초의 문화변동을 주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원을 통하여 새로운 사상체계인 성리학이 도입되고, 원과의 문화교섭이 빈번해 짐에 따라 안향(安珦)ㆍ백이정(白?程)ㆍ이제현(李齊賢) 등이 고려와 원의 학계에 교량 역할을 하면서 성리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고,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ㆍ정도전(鄭道傳) 등은 성리학에 입각하여 고려 문화 전반에 대한 비판을 가하면서 그 개혁을 주장하여 사상적 파동이 매우 컸으며 사회 전반에 걸쳐 변화와 개혁으로 이어졌다.  


 (2) 서업(書業)과 관련한 과거제도


고려는 초기에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제술과와 명경과 두 과목을 두었다. 이 두 과목은 본과로써 문반관료로 진출하는 사람은 반드시 거쳐야 했는데 작품의 우열이 당락의 기준이 되었지만 서체로도 심사가 정해지므로 서법의 훈련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또 따로 잡과를 두어 잡과 속에 서업을 두었다. 서업은 서사(書寫)를 전업으로 하는 관원을 많이 필요로 하는 정부가 둔 관직이다.


 고려 인종 때 잡과의 한 과목인 명서업(明書業)의 감시(監試)는 첩경(貼經) 방법으로 하되 2일 내에 실시하였고, 첫 날에는 설문(說文)에 6조, 오경자양(五經字樣)에 4조를 첩경방법으로 시험하여 모두 통하여야 하며, 다음날에는 서품(書品)에서 장구시(長句詩) 한 수와, 해서ㆍ행서ㆍ전서ㆍ인문(印文) 등 하나씩을 시험하되, 설문의 10궤 안에서 문리와 글 뜻을 안 것이 여섯 궤가 되어야 하며, 글 뜻은 여섯을 묻고, 문리는 4궤를 통하여야 한다는 기준이 정해져 있다.


 

서업의 감시는 자설문(字說文) 30권 안에서 백정은 3책, 장정은 5책을 각각 문리를 잘 알아서 읽고, 또 해서로 쓰게 하였다. 서학(書學)은 국자감에 속하되 학생은 모두 8품관 이상인 관원의 자제 및 서인(庶人)에게 입학의 자격을 주었다. 이들을 양성하는 기관은 성균관에 서학박사를 두어 팔서(八書)를 맡아 가르쳤다. 국자감의 학생들은 반드시 여가에 글씨를 하루에 한 장씩 쓰며, 아울러 국어(國語)ㆍ설문(說文)ㆍ자림(字林)ㆍ삼창(三倉)ㆍ이아(爾雅) 등을 학습하였다. 그리고 서리(胥吏)로는 각 관청마다 서령사(書令史)ㆍ서예(書藝)ㆍ시서예(試書藝)ㆍ서수(書手) 등이 배치되어 서사를 담당하였다. 이와 같은 관련제도의 정비는 서법의 흥륭과 보급을 촉진했다.


 2) 충선왕의 역할


충선왕(1275~1325)은 명종의 5대손이요, 충렬왕의 장자로, 고려 제 26대왕이다. 휘는 장,(璋) 초명은 ?(?), 자는 중앙(仲昻), 몽골이름은 익지례보화(益智禮普花), 모는 원 세조의 딸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홀도노게리미실(忽都魯揭理迷失)이다.


 

충선왕은 원에 가서 약 10년간 숙위하고 한국공주(韓國公主)와 결혼하여 충렬왕 24년에 즉위하였다.


 

충선왕은 1314년 충숙왕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당시 원의 명사들과 교류하였는데, 이를 통해 원으로부터 많은 문화적 영향을 받게 되었다. 원의 무종(武宗)과 인종(仁宗ㆍAurbarwada)은 충선왕과 함께 어릴 때부터 동궁(東宮)인 광천전(光天殿)에서 동거동락하며 지낸 사이다. 성종의 사후에 무종과 인종 형제는 충선왕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는데, 그 이후 이들의 혈맹관계를 집작할 수 있다.


 무종의 치세에 인종은 동궁에 있으면서 문무의 재능이 있는 선비들을 불러 들여 수용하였고 집권 이후 개혁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지대(至大) 4년(1311) 무종이 죽고 Aurbarwada는 인종으로 즉위하였다. 인종의 치세에는 충선왕이 만권당을 중심으로 동궁에서의 역할을 대신하여 조정안에는 혁신파의 정치결집의 거점으로 하고, 이들은 집권 직후 정치이념을 확립하고자 명유를 초치하여 자신들의 혁신정책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게 하였는데 조맹부도 이때(1310년) 합류하였다.


 1313년 주자학이 관학으로 선포되면서 11월 과거제도가 부활되고, 1314년 3월 관학의 정비와 그 뒷받침을 하기위한 만권당(萬卷堂) 설립을 후원하였다. 여기서 남방과 북방출신을 막론하고 조맹부(趙孟?)ㆍ요수(姚燧)ㆍ염복(閻復)ㆍ원명선(元明善)ㆍ우집(虞集)ㆍ왕구(王構)ㆍ이제현(李齊賢)ㆍ이란(李欄)ㆍ오징(吳澄)ㆍ등문원(鄧文源) 등과 노소를 불문하고 서로 사우관계를 맺으며 활동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조맹부의 문하생인 주덕윤(朱德潤) 등이 모여 서화를 즐기면서 상당한 힘을 가진 정치세력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충선왕은 1313년 강능대군(江陵大君/忠肅王)에게 전위하고 인조의 등극과 동시에 배후 실세를 넘어선 전면에서 혁신정책을 주도하였으며, 태자태부(太子太傅)에 제수되고 심양왕(瀋陽王)에 봉해지며 중서성에 들어가 정사를 참의 함으로서 고려의 국왕일 뿐 아니라 원의 공신이자 정치적인 실력자로서 원의 정치에도 직접 참여하였다. 이런 상황은 인종의 치세인 1320년까지는 충선왕이 원에서 정치적 기반을 확보하고 고려에서도 정치적인 기반을 유지할 수 있었다.

 

결국 충선왕이 원했던 대원관계는 ‘세조구제(世祖舊制)’를 앞세워 독자적인 왕조체제를 유지하는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원의 제후국으로서의 지위를 분명히 하고, 이를 바탕으로 원의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그의 재원생활은 원에서의 정치적 기반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인종은 1311년 조맹부를 집현전시강학사(集賢殿侍講學士) 중봉대부(中奉大夫)에, 연우(延祐) 원년(1314)에는 한림시강학사(翰林侍講學士) 집현시강학사(集賢侍講學士) 자덕대부(資德大夫)에, 1316년에는 한림학사 승지 영록대부(榮祿大夫)로 임명하고, 그의 말년기(1310~1322)의 약 10여년 동안은 비서감에 수장된 많은 서화를 감정하고, 표제를 썼으며, 이 때 수장된 수많은 고서화를 보았다고 여겨진다. 늘 조맹부의 글씨를 모아 보물로 수장하고 비서감에 이르길 ‘후세에 알리도록 하여라’라고 하였다.


 일찍이 신하들과 문학사를 이야기하고, 또 다른 신하들과 다른 점을 들어 그의 혈통, 성품, 시문의 경향과 면모, 서화의 뛰어남, 종교에 이르기 까지 파악하였는데 인종이 이렇게 한 신하의 사적인 문제까지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수많은 직접적인 접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인종은 조맹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자앙을 당의 이태백, 송의 소자첨에 비할 수 있으며, 성품이 순정하며 학문이 박식하고, 들은 바가 많다. 서화에 절륜하며 불교와 도교를 잘 알아 다른 사람이 미치지 못하는 바였다.


첫째는 제왕의 후예가 다른 점이요,


둘째는 풍모가 수려하고,


셋째는 박학하여 아는 것이 많은 점이요,


넷째는 행동이 절조 있고 방정한 것이요,


다섯째는 문사(文詞)가 고고(高古)한 것이요,


여섯째는 서화에 절륜함이요,


일곱째는 불노에 통하여 뜻이 심오함이다.”  


 

이제현도 그의 시 ‘화정조학사’에서 조맹부를 직접 옆에서 겪어보고 평한 시가 있다.  


"늘 지필묵을 준비하여 갓끈을 날리며 다니다가

시 한수 이뤄지면 비단 옷을 얻은 듯 기뻐하도다.

멀끔한 풍채를 바라보면 일찍이 남조에서 제일이다.

풍류에 대한 생각이 항상 평안하여 글씨 또한 늘 새로워라.

천년에 볼 수 있는 진면목을 만나보니 집에도 명필인 위부인(菅道昇)이 있다는 얘길 들었다."


 

인종과 충선왕, 그리고 조맹부와의 특별한 관계는 당시 고려와 이제현에게 미치는 영향이 컸다. 당시 원 학사인 조맹부ㆍ요수(1236~1313)ㆍ염복(1235~1312)ㆍ우집ㆍ원명선ㆍ왕구ㆍ소석 등과 함께 교유한 이 만권당의 설치는 성리학의 수용은 물론 당시 신문화 수용의 창구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만권당을 드나들던 원의 학사들을 보면 염복(1235~1312)ㆍ요수(1236~1313)ㆍ조맹부(1254~1322)ㆍ우집(1272~1348)ㆍ원명선ㆍ왕구ㆍ소석(蕭奭)ㆍ장양호(張養浩)ㆍ홍혁(洪革) 등이었다. 이들 구성원은 당시의 명유들로 모두 한족이며 강리기기(康里夔夔)같은 사람은 명필이라도 출입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만권당을 출입한 사람들은 서화가들이 아니라 당대의 유신들로서 개혁정치의 이론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요수ㆍ소석ㆍ염복ㆍ조맹부ㆍ원명선ㆍ장양호 등을 인종에게 동궁관(東宮官)으로 추천하였다가, 뒷날 만권당을 설치한 후에는 염복ㆍ요수ㆍ조맹부ㆍ우집 등을 초치하였는데, 이들은 대부분 인종의 잠저유신(潛邸儒臣)이거나, 인종에 의해 발탁된 사람들이었다. 이것으로 보아도 충선왕과 원의 유신, 그리고 인종으로 이어지는 연결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요수는 당대의 명유로 금석을 좋아하고 고증하였으며, 고동기(古銅器)에 제발을 할 정도로 골동에 대한 감식안을 가진 사람이다. 글씨는 회소를 배웠던 인물이다. 그의 문집에 ‘고려심왕시서(高麗瀋王詩序)’란 서문이 있는데, 충선왕은 그의 시문을 얻기 위하여 폐백, 금옥, 명화 등을 아끼지 않았다.


 

충선왕은 조맹부로부터 서화를 전수 받아 그림을 잘 그렸다. 또 그는 “이곳 서울의 학자들은 모두 세상에 손꼽히는 학자들인데 내 주위엔 그런 사람이 없으니 부끄러운 일이다.”하고 이제현을 불렀다. 그가 원에 도착했을 때 요수ㆍ염복ㆍ원명선ㆍ조맹부 등이 모두 왕의 주위에 모여 있었다.  


 

이제현은 그들과 상종하는 동안 학문이 더욱 발전하였으며 요수 등은 그를 칭찬하였다. 충선왕이 익재를 연경으로 초청한 것은 1314년 정월이었고, 조맹부는 61세로 약사경(藥師經/해서)을 썼으며, 그해 12월 집현전 시강학사 자덕대부로 종2품에 올랐다. 익재는 28세로 청장년기, 충선왕은 40세였다. 1320년 12월 토번으로 귀양 갈 때까지 약 7년 정도 존속하며, 인종의 후원을 배경으로 활동하였는데, 조맹부는 여기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며 교류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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