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나라' 터 닦은 이정기배달의 얼
타나토노트
2012-10-18 21:01:31 │ 조회 1331


[고구려 유민의 왕국] ‘제나라’ 터 닦은 이정기

뛰어난 무공으로 절도사 자리 장악해 15개주 통치 

 

 

‘고구려인’ 이정기(李正己)는 732년 영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이회옥(李懷玉). 영주는 당 지방행정구역의 하나였던 ‘평로(平盧)’의 중심지로 오늘날의 조양(朝陽)시다.

이정기는 무술에 능했다. 그의 무공에 대해 중국 역사책 ‘구당서(舊唐書)’는 이렇게 전한다.

“(투르크계 위구르족인) 회흘 병사가 제멋대로 행동했다. 아무도 그를 막지 못했다. 그러자 이정기가 가장 센 회흘 병사에게 결투를 청했다. 사람들은 모두 ‘회흘이 이길 것’이라고 말했다. 싸움이 시작되자 이정기가 회흘의 등을 내리쳤다. 그러자 회흘은 그 자리에서 오줌을 싸버렸다.”

이 사건으로 이정기는 군인들 사이에서 일약 ‘영웅’으로 떠오르게 된다. 때는 758년,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리더십을 발휘하던 그에게 한 가지 사건이 터졌다. ‘평로’의 절도사로 있던 왕현지가 사망한 것이었다.

절도사가 죽자 관료들은 후계자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여론은 왕현지의 아들에게 쏠렸다. 하지만 이정기의 야심은 그렇지 않았다. ‘유력 후보’만 제거하면 되는 일이었다. 26세의 이정기는 칼을 뽑았다. 왕현지의 아들을 살해한 것이었다.

이정기는 같은 고구려인이자 자신의 고종사촌인 후희일을 내세웠다. 조정은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병사들의 ‘영웅’ 이정기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평로는 수만명의 고구려 유민들이 살고 있던 ‘한민족의 땅’이었다.

안사의 난(755년) 이후 쇠락의 길을 걷던 당은 고구려 유민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황제 숙종은 타협을 택했다. 762년 후희일을 평로 절도사로 임명한 것이다. 이것은 군인에 의해 절도사가 옹립된 당나라 최초의 사건으로 기록된다.


평로를 얻은 이정기는 본격적으로 힘을 키우기 시작했다. 위덕(威德) 절도사 이보신과 하북에서 연합세력을 구축한 것이다. 그런 그에게 또 하나의 찬스가 왔다. 산동반도의 청주(靑州)에서 무장 사조의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조정은 평로 절도사에게 진압을 명했다. 선봉은 이정기였다.

이정기는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유주(幽州)와 범양(范陽)에서 사조의의 군대를 대파시켰다. 패한 반군은 청주로 몰렸다. 청주는 현재의 익도(益都)로, 반군의 본거지였다. 이정기는 사조의를 끝까지 추격, 청주를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이 공로로 이정기와 후희일은 평로(平盧)·치청(淄靑)·기주(沂州)·제주(齊州)·밀주(密州)·해주(海州) 일대를 관할하게 된다.

●무술 뛰어나… 일격에 오랑캐 제압

병사들은 무술이 뛰어나고 성격이 침착한 이정기를 따랐다. 그런 이정기를 시기한 것은 뜻밖에도 절도사 후희일이었다. 후희일은 고종사촌 이정기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자기 자리를 뺏길까봐 불안해하던 후희일은 이정기에게 주었던 병마사직을 박탈한 뒤 엉뚱하게도 불탑 건립에 몰두했다. 그러자 공사에 동원된 병사들로부터 불평이 터져나왔다. 반감은 반란으로 이어졌다.

후희일은 불교뿐 아니라 미신에도 빠져 있었다. 가는 곳 마다 점쟁이들을 데리고 다녔다. 그날도 그는 무당과 함께 성 밖으로 나갔었다. 군사들은 그 틈을 노렸다. 후희일이 성을 비우자 성문을 닫아 걸고 열어주지 않은 것이다.

“성문을 열어라.”

“…….”

성 안에서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문을 열라고 하지 않느냐?”

“열어드릴 수 없소.”

차가운 목소리가 반응했다. 후희일은 그제서야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후희일은 분노했다. 그를 수행했던 부대는 많지 않았지만 노한 후희일은 앞뒤를 가리지 못했다. “성을 공격하라.” 후희일이 명령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후희일은 병사들의 반격에 쫓겨 도망가고 말았다.


이 반란을 이정기가 사주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조정은 이정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방에 대한 장악력을 이미 상실했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평로치청절도관찰사·해운압신라발해양번등사·검교공부상서·겸어사대부·청주자사를 제수하면서 ‘이정기’란 새 이름을 내렸다. 이 때가 765년, 이정기의 나이 33세의 일이다.

여기서 눈여겨 봐야 할 것은 ‘해운압신라발해양번등사(海運押新羅渤海兩蕃等使)’란 직위다. 당 역사상 최초로 설치된 이 관직은 당~신라~발해~왜를 오가는 모든 왕래를 총괄하는 것으로 낙양 동쪽에서 일어나는 사안에 관해 전권을 행사하는 자리였다.

무역은 ‘동양의 로마’ 당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당시 신라는 연1회 이상 당에 조공을 바치고 있었다. 신라 사신이 당에 드나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정기를 거쳐야 했다. 바다 교통의 요지 등주(登州)와, 육상 교통의 중심지 영주(營州)가 모두 그의 관할이었기 때문이다.

발해도 마찬가지였다. 766~779년까지 13년 간, 발해는 무려 143회에 걸쳐 당으로 공식사절을 파견했다. 이정기는 당~발해뿐 아니라 발해~왜를 오가는 모든 무역을 관장했다. 여기에 수반되는 음성적 상거래도 물론 그의 몫이었다.

이정기의 ‘시장’에서 조정은 방관자였다. 이곳에서는 발해의 말(馬)을 포함, 당이 발해로부터 수입을 금하고 있던 금·은·동 등이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이정기가 장악하고 있던 산동은
rn예부터 농산물이 풍부한 옥토였다. 게다가 이곳에는 염전이 있었다. 소금은 당시 가장 값비싼 재화의 하나였다. 766~779년 사이에 당이 거둔 국고수입의 절반은 소금을 통해 얻은 염리(鹽利)였다. 이정기는 소금 판매와 회수(淮水)의 조운(漕運), 국제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富)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마련된 자금은 훗날 황제와의 싸움을 가능하게 해준 밑천이 된다.


당은 번진(藩鎭) 세력의 발호와 이민족의 침입, 환관의 횡포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당시 가장 강력한 번진은 위박(魏博) 절도사인 전승사(田承嗣). 그는 자신의 아들을 황제의 딸과 결혼시킨 뒤, 황제의 명을 거역할 정도로 위세를 떨었다. 황제 대종(代宗)은 전승사를 제거해야 했다. 이 때 그가 도움을 청한 사람이 바로 이정기였다.

●‘당~발해~신라~왜’ 국제무역 통해 자금 확보

이정기는 위덕(威德) 절도사 이보신과 힘을 합쳤다. 한 달 이상 이어진 전투에서 이정기는 전승사를 격파, 그의 영역이었던 덕주(德州)를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해인 776년 정월, 이정기는 전승사의 세력을 뿌리뽑겠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 전투는 8개월 간 계속됐다. 그 결과 이정기는 2개의 주를 추가로 합병하고 적장 전승사를 사로잡는 데 성공한다.

“나이가 많은 노인이니 예의를 갖춰 대하라.” 이정기는 병사들에게 엄명을 내렸다. 그리고는 직접 포로 전승사를 찾아가 깍듯하게 예우했다. 뿐만 아니었다. 수차에 걸쳐 황제에게 상소를 보내 전승사를 용서해 줄 것을 청했다. 그리고 얼마 뒤엔 자신의 손으로 전승사를 석방시켜 주었다. 애써 생포한 전승사를 이정기는 왜 풀어준 것일까?

그가 의식했던 것은 다른 절도사들의 눈이었다. 당의 운명은 몇몇 절도사의 손아귀에 달려 있었다.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전승사를 공격하긴 했지만, 이정기에겐 조정보다 절도사들과의 관계가 더 중요했다. 전승사는 이 일로 인해 이정기에게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된다. 전승사 사망 후, 그 자리를 이은 전열이 이정기와 동맹을 체결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전승사를 잡았다 풀어줌으로써 이정기는 조정과 절도사들, 양쪽 모두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황제는 전승사를 제압해 준 이정기에게 ‘검교사공·동중서문하평장사’란 관직을 내렸다. 검교사공은 삼공(三公)의 지위 중 하나. 동중서문하평장사란 이정기를 재상으로 봉한다는 의미다. 이것은 조정이 이정기의 협조없이 지방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행정가로서의 이정기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구당서 124권 ‘이정기전’은 그의 통치 스타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이정기는 정사를 다스림에 있어 엄할 뿐 아니라 가혹했다. 그가 있는 곳에서는 감히 여러 명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그는 치·청·제·해·등·래·기·밀·덕·체 등 10여개 주를 관장하면서 이보신·영호창·설숭·양숭의·전승사 등의 절도사들과 영향을 주고 받았다.”


▲ 당서(唐書).
618년 당나라를 세운 '고조'부터 907년 나라를 잃은 '애제'에 이르기까지 21제(帝) 290년 간의 일을 기록한 정사(正史)다.


위의 기술은 이정기가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전제적 리더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당대의 절도사들과 친분을 구축해 왔으며 그들로부터 인심을 잃지 않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구당서 ‘양숭의전’은 “이정기·이보신·설숭·양숭의·전승사 등 5명의 절도사들이 당의 고관직을 독점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15개 주 다스리던 ‘최강 절도사’

5년 뒤인 781년 정월, 이정기와 고락을 함께 했던 성덕 절도사 이보신이 숨을 거뒀다. 이보신의 아들 이유악은 절도사 지위를 세습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황제 덕종은 단호하게 이를 거부했다.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이유악을 지지하던 이정기·양숭의·전열 등 당대의 제후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이들 ‘4인방’은 중대한 결정을 하게 된다. 당 조정을 전복시키는 쿠데타를 결심한 것이다.


당시 이정기가 다스리던 영역은 도합 15개 주. 이는 오늘날 한반도 크기에 버금가는 넓이였다. 방대한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일관된 법령을 적용할 필요가 있었다. 중앙의 권력은 너무도 취약해 있었고 황제의 명령은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정기는 달랐다. 발해의 법체계를 응용해 법률을 정비하고 독립된 조세제도를 만들어 엄정하고 일관되게 적용했다. 독립된 국가의 틀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 역사책 구당서는 이 때의 이정기와 이보신을 ‘이제(二帝)’라 표현하고 있다(二帝, 指寶臣·正己也). 이 기록은 ‘최강의 절도사’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던 그들을 당시 사회가 임금으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뜻한다.

쿠데타를 결심한 이정기는 청주에서 운주로 거처를 옮겼다. 운주는 산동과 낙양을 잇는 길목. 이정기의 첫 번째 공략 목표는 제국의 ‘동쪽 수도(東都)’ 낙양이었던 것이다.


이정기는 청주의 관리를 아들 이납(李納)에게 맡기고 낙양 공략에 몰두했다. 이정기는 이 싸움에 목숨을 걸었다. 자신이 전사할 경우에 대비, 이납에게 ‘치청절도유후(淄靑節度留後)’라는 직위를 부여한 것이다. 이는 죽기 전에 영토를 세습한다는 의미로 황제가 아니면 행할 수 없었던 파격적 조치였다.

조정은 긴장했다. 가장 강력한 절도사의 병력이 낙양의 코앞, 운주에 진을 친 것이었다. 이정기는 주야로 군사를 훈련시키며 전쟁을 준비했다. 조정도 방위에 착수했다. 낙양과 운주 중간에 위치한 변주(州;오늘날의 개봉)에 성을 쌓기 시작한 것이다. 조정이 성을 축조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이정기는, 경계지역인 제음(濟陰)에 10만의 병력을 주둔시켰다. 당시 장안을 수비하던 황제 직할대의 병력은 5만. 이정기가 동원한 10만 병력은 당시로선 국가를 무너뜨릴 수 있는 엄청난 수의 군사였다.

황제는 십일세(十一稅)란 세금을 새로 거둬 전쟁 자금을 마련하는 한편, 천하에 동원령을 내려 9만2000명의 병력을 제음 부근으로 전진 배치시켰다. 때는 781년.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황제군과 전투… 낙양 보급로 끊어

이정기의 계획은 치밀했다. 초반 전투에 밀릴 경우를 대비, 제음에서 140km가량 떨어진 서주(徐州)에 2차 병력을 집결시켰다. 서주는 양자강(揚子江)과 회하(淮河; 황하)의 물길을 타고 낙양으로 들어가는 수상 교통의 요충지였다.

강회(江淮; 양자강과 회하)의 물품 보급로가 끊기면 정부군은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된다. 조정은 ‘물길’을 지키기 위해 강변의 요지인 용교(埇橋)와 와구(渦口)에 군사를 배치하고 1000척이 넘는 배를 정박시켜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다. 다급한 황제 덕종은 방추병(防秋兵)을 동원해 보급로를 지키도록 했다. 방추병은 토번(티베트)과 회흘(위구르족)의 침입에 대비하던 일종의 비상근 부대였다. 이를 동원했다는 사실은 북쪽의 국경 수비라인이 뚫린다는 의미였다. 이정기를 막는 것이 그만큼 위급했던 것이다.

당의 노력은 효과가 있었다. 이정기 연합군은 한동안 강회를 얻지 못하고 주변에서 맴돌아야 했다. 그러나 정부군의 방어는 오래 가지 못했다. 전승사의 조카 전열과 이보신의 아들 이유악, 그리고 이정기의 오랜 동지 양숭의가 병력을 이끌고 가세한 것이었다.

승자는 이정기였다. 물길의 요지인 용교와 와구를 장악, 낙양으로 가는 수송로를 끊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조정은 두려움에 빠졌다. 천하통일의 큰 그림이 그려지는 판이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사고가 생겼다. 운명의 신도 용장을 두려워했던 것일까? 이정기가 악성 종양에 걸린 것이었다.

낙양 함락이 임박한 상황이었다. 측근들은 치료를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그러나 아무리 약을 써도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뽑은 ‘칼’을 제대로 휘둘러 보지도 못한 이정기는 781년 8월, 통한의 눈을 감아야 했다. 그의 나이 49세였다.

이정기의 죽음을 알게 된 조정은 즉각 회유에 나섰다. 황제는 죽은 이정기를 태위(太尉)로 추증하고, 관련자의 죄를 묻지 않겠다며 동맹군을 달랬다. 리더를 잃은 동맹군은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결국 황제의 타협안을 받아들였다. 중원의 피비린내가 가시는 듯했다. 하지만 ‘억지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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