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나라를 세운 아골타, 신라의 후예였다!(역사스페셜)
관리자
2014-05-22 16:05:57 │ 조회 3755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 신라의 후예였다



 

1908년 중국 청나라 선통 황제가 즉위했다. 그러나 그는 중국 역사의 마지막 황제였다. 중국 혁명 후 그는 친일 전범자로 법정에 선다. 황제의 본명은 아이신줘러 푸이였다. 아이신줘러, 즉 애신각라. 이것은 청 황실의 성씨이다. 성이 꽤 길다.

 



 

하지만 이 아이신줘러에는 한반도와 만주, 동북아를 꿰뚫는 역사의 비밀이 담겨져있다. 아골타와 누르하치, 이 이름을 기억해보자. 아골타는 여진족으로 금나라를 세운 금태조이다. 누르하치는 또한 여진족으로 후금, 청나라를 세운 청태조이다. 오늘 우리는 그동안 북방 오랑캐 정도로만 여겨져왔던 여진족, 혹은 만주족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 역사 속의 비밀을 풀어내고자 한다.

 


 

카이펑은 중국 역사상 가장 문화가 발달했던 송나라의 수도였다. 1100년대 카이펑은 인구 50만의 국제도시였다. 로마나 유럽의 도시들이 인구 4-5만의 불과하던 시대임을 감안하면 국제도시 카이펑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청명상하도. 당대 최고의 화가 장택단이 화려한 카이펑 시가를 그려 송황제 휘종에게 바친 중국의 보물이다. 넘치는 물살과 활기 넘치는 카이펑의 모습이 생생히 담겨있다. 광적으로 예술을 사랑했던 휘종 황제의 후원 아래 문인 예술가들은 절정의 중국 문화를 표현했다. 그러나 카이펑에는 치욕적인 한족의 역사가 서려있다.



1100년대 중국 송나라는 북방민족 거란이 세운 요나라와 대립하고 있었다. 당시 만주는 거란이 세운 요나라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고 만주에 살던 여진족도 거란의 지배를 받았다. 그들 중 거란족에 직접적인 지배를 받던 여진족을 숙여진이라고 하고 송화강 동쪽에 거주하며 간접 지배를 받던 이들을 생여진이라고 했다. 

 


 

중국 하얼빈 인근 송화강 유역에서 유목과 농경을 하던 만한여진족도 간접지배를 받던 생여진 중 하나였다. 일찍부터 북방에선 여진족이 1만명 뭉치면 대적하지 말라는 말이 있었다. 그래서 거란족은 철저히 여진족을 뭉치지 못하게 경계했다. 그러나 만한여진족은 거란의 통제 속에서도 서서히 힘을 결집하고 있었다.

 


1114년 1만의 여진족이 요나라 10만대군을 하얼빈 인근 추라전에서 대파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하룻밤 사이에 만주의 질서는 뒤집어졌다. 추라전 전투의 주도자는 만한여진의 지도자 아골타였다. 1115년 아골타는 곧바로 금나라를 건국하고 황제가 된다. 

 


 

1125년 요나라를 멸망시킨 아골타는 한족의 북방저지선인 만리장성을 넘어 바람처럼 남진한다. 금나라 군대는 순식간에 황허를 건너 한족의 나라인 송의 수도 카이펑으로 밀려들었다. 놀란 송황제 휘종은 화친을 제의하지만 끝내 카이펑은 금군에 점령당한다. 중국 역사상 최초로 한족의 심장부인 중원을 이민족에게 내어주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정강지변, 휘종과 흥종 부자는 여진족의 포로가 되는 참담한 신세가 되었다. 이것이 한족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정강의 변이다.




 

왕우량 교수 ㅣ 중국 다렌대학 : 1127년의 정강지변은 중국역사상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북방민족, 즉 중국동북지방의 여진족, 작은 민족이 요국을 멸망시킨 후 다시 중국역사상 강대한 왕조인 송 왕조를 멸망시킨 사건입니다. 이때부터 북방민족은 중원의 통치자가 되고 북방민족이 북경을 기초로 정치통치 중심이 되는 기반을 닦습니다.



한족의 심장부를 점령한 여진 추장, 아골타. 아골타는 금을 건국한 후 황실의 성을 완안씨로 정한다. 금태조 아골타의 정식 이름은 완안 아골타다. 송을 정벌할 때 금나라 군부의 핵심 인물은 아골타의 넷째 아들 완안 올출이었다. 
 

 



 

황제가 이민족에게 잡혀간 충격때문에 정강의 변은 영화나 드라마에 단골 소재가 되었다. 완안 올출도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진우주, 그런데 아골타의 아들 완안 올출을 진우주, 즉 우리말로 김올출로 부른다. 완안 올출을 왜 김올출로 부를까? 금나라 왕자의 이름이 완안이 아니고 왜 김씨일까?



 

중국 서부 깊숙한 곳 감숙성의 경안현에는 뜻밖에도 완안 성씨들이 동족촌을 만들어 살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의 직계 조상이 금태조 아골타의 넷째 아들 완안 올출, 즉 김올출이라 했다. 왜 금황족의 후손들이 만주와 정반대인 땅인 이곳에 살고 있을까? 아직도 가족공동체를 유지하며 척박한 환경때문에 밭농사를 지으며 생활하고 있다.



현대식 집을 짓기는 했지만 감숙지방의 전통적인 주거형식인 토굴생활도 병행하고 있었다. 오지에 정체를 숨긴채 5000여명의 완안씨들은 씨족공동체를 만들어 800여년동안 이어오고 있었다. 이들은 1140년대에 김올출, 즉 완안 올출의 아들이 금황실 내부 정쟁에 휘말려 살해되자 이곳으로 탈출했다고 한다. 역대 금황실의 황제와 형제들을 그린 선인영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완안 청베이 ㅣ 완안 올출 후손 : 김올출은 금희종이 즉위하도록 돕고 해령왕을 배척했습니다. 희종이 황제가 되었지만 해령왕이 희종을 살해합니다. 해령왕은 희종을 죽인 후 김올출의 후손을 죽이려합니다. 김올출의 아들 완안형은 해령왕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후손들도 완안 올출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김올출이라고 부른다. 명절이면 전부족이 모여 제사를 지내는 완안씨 사당에는 역대 황제와 자신들의 선조인 완안 올출의 비가 있었다. 완안 올출의 비에도 역시 김올출의 이름이 뚜렷이 새겨져있었다. 왜 그들의 이름을 완안씨라고 하지 않고 김씨라 부를까?

완안 청베이 ㅣ 완안 올출 후손 : 학술계에서는 아직 확정을 짓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김올출의 성은 금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듯합니다. 성이 김이고 이름이 올출입니다.

후손들도 오래전부터 그냥 김올출이라 불렀을 뿐 정확한 이유는 몰랐다. 만주에서 감숙까지의 거리만큼이나 기나긴 역사의 비밀이 세글자에 담겨있다. 진우주, 즉 김울출, 중국 금나라의 왕자가 김씨 성이라고 하니 상당히 흥미롭다. 잘 아는 것처럼 김씨 성은 우리나라에서야 가장 흔한 성씨이나 중국에서는 대단히 드문 성이다.




중국대륙에는 워낙 많은 왕자들이 흥하고 망해서 상당히 헷갈린다. 잠시 중국과 만주의 역사를 정리해보도록 하자. 668년 고구려가 당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30여년 후인 698년 고구려의 후예 대조영이 옛 고구려땅에 발해를 건국한다.



그러다 926년 거란족이 발해를 멸망시키는데 거란족이 요즘 우리가 드라마 천추태후에서 볼 수 있는 요나라를 세운 사람들이다. 이때 여진족은 요동에서 살고있었는데 야골타라는 영웅이 등장하면서 1115년 금나라를 세우고 요나라를 멸망시킨다. 그리고 금나라는 곧바로 한족의 나라인 송을 침략해 중원대륙을 초토화시키는데 한족의 본거지인 중원대륙은 이때부터 북방이민족들에 의해 농락당하게 된다. 그런데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 아골타의 선조들이 상당히 흥미로운 사람들이다.




강화도 마니산. 이곳은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의 뿌리와 정기를 숭상하는 사람들이 모여들곤 했다. 이 개천각은 민족운동가였던 이유립 선생이 설립해 24분의 우리나라 위인을 모시고 있다.




환웅 천제, 치우 천왕, 단군 왕검, 태조 왕건, 대조영 등을 모시고 봄, 가을 두번 제사를 지낸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곳에는 금태조 아골타가 모셔져 있다. 여진조인 아골타가 왜 우리나라 위인들과 나란히 모셔져 있을까?



구한말 역사학자이자 민족주의자였던 박은식 선생은 금태조 아골타를 꿈에서 만났다는 몽배금태조라는 글을 남겼다. 그런데 이 글에서 대금국 태조 황제는 우리 평주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역사학자가 왜 이런 주장을 했을까? 중국 하얼빈 근교의 아청시는 금나라의 수도인 상경회령부가 있던 곳이다. 제국의 흔적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여진족 아골타는 우리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아청에는 여진족의 후예인 만주족의 집단 거주지가 있었다. 그런데 여진족의 전통가옥이 눈에 익다. 짚을 섞어 쌓은 흙벽과 가로지른 서까래는 우리 옛날 시골집을 닮았다. 한 켠에는 볏짚으로 이은 행랑채와 제래식 화장실이 있고 텃밭도 있다. 한족들의 가옥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구조다. 집 내부는 우리와 같이 온돌을 이용해 난방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여가시간이면 모여서 전통방식의 겨루기를 즐긴다. 그것은 씨름이었다. 경기방식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씨름과 대단히 흡사하다. 이또한 한족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놀이다. 옛날 우리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풍경이다. 말도 문자도 잃어버리고 이젠 만족이라 불리는 여진족의 후예들. 이들의 조상인 금태조 아골타와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베이징의 수도 도서관은 중국 최대의 도서관이다. 특히 이곳에 고문헌 자료실에는 각종 고서들이 보관되어 있다. 그런데 사서 중에 금황실의 가계를 기록한 송막기문이라는 책을 볼 수 있었다. 여진족 금나라에 쫓기던 송은 양자강 넘어 항저우로 피신한다. 그리고 포로로 잡혀간 황제의 귀환을 위해 1129년 금에 홍호를 파견했다. 송막기문은 남송의 홍호가 10년동안 금나라에 머물며 기록한 당대의 생생한 증언이다. 그런데 송의 사신 홍호는 놀라운 기록을 남겼다. 여진추장은 신라사람이라는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금나라의 정사인 금사에는 자신들의 황실 뿌리에 대해 상세히 기록해놓았다. 형 아곤연은 고려에 남고 둘째인 금의 시조와 동생 보할리는 여진으로 왔다는 것이다. 이 금시조의 8대손이 태조 아골타다.

금나라 시조의 이름은 함보며 고려에서 왔다 - 금사 본기 -

고려에서 온 금나라 시조의 이름은 함보였다 신라와 고려인이란 차이는 있지만 두 사서 모두 금의 선조가 한반도에서 넘어온 것으로 기록했다. 아골타는 1068년생이다. 8대조 함보로 거슬러가면 대략 900년대 초반이 된다.

왕우량 교수 ㅣ 중국 다렌대학 : 한푸는 고려에서 왔다고 말하거나 고려 전의 신라에서 왔다고 말해도 무관할 것 같습니다. 왕건이 이미 고려를 세웠고, 신라는 멸망한 시기로 조선반도는 동란의 시기였습니다. 여기서 왜 함보가 이동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기록으로 봐서 한 사람만 왔을리 없습니다. 분명히 가족 또는 자신의 씨족이나 부락을 데리고 왔을 겁니다. 이것은 민족의 이동이었습니다.

 



신라말 고려초에 격동하는 정세 속에 한 무리의 세력이 한반도에서 만주로 이동한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중국 수도도서관 고문헌실에서는 금나라에 관한 흥미로운 내용들을 속속 확인할 수 있었다. 흠정 만주 원류고는 1600년대 초반 여진족이 세운 또 하나의 나라 청나라의 공식 역사서다. 이 책에는 금의 국호에 대한 설명이 있다.

사서를 보니 신라왕실인 김씨가 수십세를 이어왔고 금이 신라로부터 온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금나라 국호 또한 김씨 성을 취한 것이다

- 흠정만주원류고 -

금은 신라 김씨에서 유래했고 국호도 이를 딴 것이며 그외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단호하게 정리했다.

김위현 명예교수 ㅣ 명지대 사학과 : 지금 새로운 주장이 아니고 이미 900년전에 정사에 나와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한반도에서 넘어갔던데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장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주장한겁니다. 그래서 지금와서 아니다라는 논란은 있을 수 없습니다.

북만주에서 바람처럼 일어나 중국 대륙을 제패했던 여진의 영웅 아골타. 그의 8대조는 고려초에 한반도에서 넘어간 사람이었다. 천년 넘는 역사의 저편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거짓말 같은 이야기지만 엄연히 중국정사에 기록되어 있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내용은 앞서 본 송막기문, 금사, 흠정만주원류고 뿐 아니라 금지, 삼조부맹회록 등에도 줄줄이 기록되어 있다. 이민족으로는 최초로 중국대륙을 장악하고 한족 황제를 포로로 잡았던 여진족. 그들의 선조는 한반도로부터 왔고 그들의 성씨는 김씨였다. 갈수록 흥미진진해진다. 금태조 아골타의 선조인 의문의 사나이 김함보. 그는 과연 누구일까?

신라의 왕릉은 모두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 있다. 그런데 유일하게 신라 마지막 왕이었던 경순왕의 무덤만이 경기도 연청에 있다. 왜 신라왕릉이 경기도에 있을까?



후삼국 말기 고려의 압박에 경순왕은 신라 천년사직을 고려에 넘기기로 한다. 그러나 마의태자는 천년사직을 고려에 넘기는 것에 대해 결사반대했다.

왕자는 울면서 하직하고 떠나 곧바로 개골산에 들어가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삼고 삼베옷을 입고 풀을 먹으며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순왕 9년 -

그렇게 신라 천년사직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에는 특이한 지명이 있다. 다물. 다물은 빼앗긴 나라의 광복을 뜻한다. 이곳 강원도에 무슨 나라가 있었다는 것일까? 그런데 금강산에서 쓸쓸히 죽었다는 마의태자의 행적에 의문을 품게하는 유적들이 이곳 인제에 있다. 왜 마의태자 유적비가 여기 있을까?

 



 

인제군 상남면 김부리에는 수백년된 대왕각이라는 사당이 있다. 매년 김부리 사람들은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대왕각에는 마의태자가 모셔져 있다. 인제 인근 곳곳에 남아있는 마의태자 관련유적은 나라가 망한 후에도 신라인들이 고려에 저항했음을 보여준다.

박성수 교수 ㅣ 한국학 중앙연구원 : 천년이나 되는 신라가 아무 저항없이 망했다고 하는 것은 상식에도 맞지 않는 것입니다. 신라의 화랑들이 그대로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의태자가 반대했듯이 많은 사람들이 반대해 가지고 신라의 저항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강원도 인제 유적들이 있죠.

 



고려에 항전하던 고려의 반 세력들. 그들과 금나라 황실의 시조가 된 김함보는 어떤 관계일까? 고려사에는 금의 시조에 대한 구체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평주의 승려인 금준이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 금의 선조가 되었다. 혹자는 평주의 승려 김행의 아들 극수가 금의 선조라고도 한다.


평주의 승려인 금준이 여진에 들어가 금나라의 선조가 되었다

혹은 평주 승려 김행의 아들 극수라고도 한다

- 고려사 예종10년 -

 




그런데 고려사에 나오는 김행과 같은 이름이 등장하는 기록이 남아있었다. 1636년 김세렴이 일본 통신사로 다녀오면서 남긴 해사록이라는 책에는 놀라운 기록이 나온다. 경주에 들른 감회를 쓴 대목이다. 조선 유학자가 여진족 아골타를 경순왕의 외손이자 안동 권씨 시조인 권행의 후손이라 했다.

완안 아골타는 경순왕의 외손이자 권행의 후손이다

아골타의 선조 함보는 김씨인데 왜 권행의 후손이라 했을까?

 




서기 930년, 고려왕건과 후백제 견훤은 안동 경산에서 대혈투를 벌인다. 이때 안동의 권행과 김선표, 장장필 세사람이 왕건을 도움으로써 고려군은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왕건은 이 세사람에게 태사의 직위를 내리고 김행에게는 권씨를 하사했다. 이로써 김행은 안동 권씨 시조인 태사공 권행이 되었던 것이다. 고려사에 나오는 김행이 안동의 김행인지는 명확치 않지만 권행은 본래 경주 김씨였다. 그런데 태사라는 최고의 직위를 받은 권행과 그의 후손들은 이후 백년 넘게 고려 조정에 나가지 않는다.

박성수 교수 ㅣ 한국학중앙연구원 : 신라에 대한 충성심 후백제의 공격을 막고 어디까지나 신라를 위해 싸운 것이지 왕건을 위해서 싸운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해석해야만 그가 왕건의 벼슬을 하지 않은 것을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김함보가 누군지 명확하지 않지만 그는 김씨 출신의 신라광복군으로 추정되며 그가 금나라 태조 아골타의 선조임은 명확해졌다.

 


김위현 명예교수 ㅣ 명지대 사학과 : 김한보는 신라 왕족임에 틀림없습니다. 신라가 망하고 김함보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반고려세력들이 동해안을 거쳐서 두만강을 건너서 여진지역에 옮겨간 걸로 추론이 됩니다.

격동의 시기, 망국의 한을 품고 북으로 올라간 김함보의 그의 무리들, 그들에게는 새로운 땅, 드넓은 만주벌판이 기다리고 있었다.

신라인 김함보의 후손들이 만주를 통일하고 나아가 한족의 본거지인 중국대륙을 장악했다, 북망민족인 만주에 중국이 흡수된 형국이다. 우리 역사에서 여진족은 음루, 말갈, 물길, 숙신, 주신, 여지, 여진 그리고 만주족으로 등장한다. 부여와 고구려, 발해의 주요한 구성원들이었고 우리 역사의 한 축을 이루던 사람들이 바로 여진족이다.

금사에 따르면 김함보가 여진족의 땅으로 들어갈 당시 여진의 각 부족하에서는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김함보가 우마변산법이라고 하는 일종의 성문법을 제정하고 각 부족으로부터 합의를 이끌어냄으로써 그 지도력을 인정받게 된다. 이후 그의 후손들은 완안 여진뿐만 아니라 전체 여진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그리고 그의 7세손에 이르러서는 영토가 간도에까지 확대된다. 그리고 1102년에는 고려로 사신을 보낸다. 그런데 아골타가 이 여진족의 지도자가 되기 직전 고려와 대충돌이 일어난다.




1107년 12월. 윤관 장군이 지휘하는 고려군 17만명은 여진정벌에 나선다. 고려군의 상대는 김함보의 후손들이었다. 김함보가 여진족의 지도자가 된지 150여년후, 팽창하던 여진족은 함경도 인근에서 고려와 잦은 충돌을 벌인다. 이 그림은 윤관이 여진을 정벌하고 국경비를 세우는 장면이다. 윤관 장군은 이 전쟁에서 동북9성을 확보하고 최북단인 공험진에 국경비를 세웠다.





고려의 북쪽 국경선인 공험진은 어디였을까? 일제강점기때부터 공험진의 위치는 함경남도 일대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윤관이 국경비를 세운 공험진은 함경도 종성에서 북으로 700리 지점이라고 되어있다. 세종때 실측한 이 지도를 보더라도 공험진은 함경북도 종성의 북쪽이고 두만강 너머에 있었던 것이 명확해진다. 공험진비는 이곳 옌지시 인근에서 발견되었다는 기록만 전해져올뿐 행방은 알 수 없다. 조선국회도와 북관유적도 등을 종합해볼때 공험진은 이곳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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