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匈奴, Hun)
타나토노트
2012-05-12 11:46:02 │ 조회 1136

흉노(匈奴, Hun)  

 


흉노는 기원전 3세기 말에서 기원후 1세기 말까지 몽골고원·만리장성 일대를 중심으로 활약한 유목기마민족들(遊牧騎馬民族)이 형성하였던 북몽고와 중앙아시아 일대의 국가였다. 그들의 선조가 주대(周代)에 중국의 북변을 위협하였던 험윤(玁狁), 훈육(獯鬻)이라는 설이 있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중국을 통일하였을 무렵(BC 221년), 흉노 연제(攣鞮: 虛連題) 씨족의 족장 두만 선우(頭曼 單于: 텡그리쿠투 선우, 선우는 북아시아의 유목국가의 군주의 칭호로서 터키-몽골어에서 ‘하늘의 아들’ 즉 흉노의 왕을 뜻하며, 칸(Khan, 가한; 可汗) 이전에 사용된 칭호)가 몽골고원의 제족들(諸族)의 연합(聯合)에 성공하였다. 그러다가 아들인 모돈(冒頓: BC 209∼BC 174년, 묵특 또는 묵돌이라고도 표기함. 몽골식 원명은 바토르)이 아버지를 살해하고 선우라 칭하며 스스로 군주 자리에 올랐다.


모돈은 남만주의 동호(東湖), 북방의 정령(丁令), 예니세이강(江) 상류의 키르기스를 정복하고, 서방의 월지(月氏)를 격파하여 북아시아 최초의 유목국가를 세우고, 이어 산시성(山西省) 북부에 침입하였다. 한(漢)나라의 유방(劉邦)은 북진하여 이를 요격하였으나, 다퉁(大同) 부근에서 포위되어 간신히 탈출한 다음, 한(漢) 황실의 딸을 선우에게 주어 처를 삼게 하고, 매년 많은 견직물, 술, 쌀 등을 흉노에게 보낼 것을 조건으로 화의(和議)를 맺었다(BC 198년). 그 뒤 흉노는 오손(烏孫)과 동(東)투르키스탄의 오아시스 제국(諸國)을 지배하였는데, 그 결과 흉노의 지배권은 동의 러허(熱河)에서부터 서의 동(東)투르키스탄, 북의 예니세이강(江) 상류에서부터 남의 오르도스에 이르렀다. 


 

흉노의 주요한 경제적 기지는 동(東)투르키스탄에, 군수기지는 내(內)몽골의 오르도스에 있었는데, 전자(前者)에서는 물산(物産)과 교통 ·통상보호세(保護稅)가 거두어졌고, 후자에서는 스키트 ·시베리아계(系)의 청동기, 그 중에서도 특히 무기류(이른바 綏遠 또는 오르도스 靑銅器)가 제작되었다. 이리하면서 흉노는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나, 그러나 이를 제압하고자 한나라 무제(武帝: 재위 BC 141∼BC 87년)는 자주 원정군을 보냈고 동시에 흉노를 동서로부터 협격(狹擊)하는데 협력을 받고자 장건(張騫)을 월지에 파견하였다(BC 139∼BC 126년). 이와 같은 정책 때문에 흉노는 외(外)몽골로 도피하게 되었고, 동투르키스탄은 한나라의 세력하에 들어갔으며, 정령, 선비(鮮卑) 등의 예속제족들(隸屬諸族)은 독립하게 되었다.

 


거기다가 흉노에서는 내분이 일어나 5명의 선우가 난립하였고, 이어서 질지 선우(郅支 單于: 西匈奴)와 아우인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 東匈奴)가 대립하였다(BC 54년). 그러다가 호한야가 한나라에 항복하여 그 원조 아래에 들었다. 질지 선우는 한나라와 호한야의 연합이 두려워 서쪽 키르기스 초원으로 옮겼지만 한나라의 원정군에게 패하여 살해되었다(BC 36년). 그 뒤 흉노는 호한야를 중심으로 다시 부흥하여 왕소군(王昭君: 한나라 元帝의 後宮)을 아내로 맞이하는 등, 한나라와의 관계도 일시 소강상태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재차 내분이 일어나고 호한야 선우가 후한(後漢)에 투항하여 남(南)흉노가 됨으로써, 남(南)흉노와 북(北)흉노로 분열하였다(48년). 남흉노는 간쑤(甘肅), 샨시(陝西), 산시(山西) 등에 나뉘어 살면서 중국 북변·서북변의 방위를 담당하였다. 그러다가 남흉노는 서진(西晉)에서 내분이 일어난 것을 틈타 반란을 일으켜 5호16국 중, 한(漢: 前趙), 북량(北凉), 하(夏)를 세워 점차 중국화(中國化)되기 시작하였다. 북흉노는 때로 중국에 침입하기도 하였으나 선비의 공격을 받아 선우가 살해되었고, 후한 ·남흉노 연합군이 그 본거지를 공격하게 되자 대패하였다(91년). 그리하여 몽골고원에서 흉노가 세운 북흉노는 와해되었다. 남은 세력들은 선비, 또는 유연(柔然) 등의 국가에 복속되었다.

 


몽골고원을 중심으로 진(秦), 한을 위협했던 북흉노의 자손이 바로 유럽의 민족 대이동을 불러일으킨 훈족이라는 설이 있다. 이 문제는 처음으로 학계에 제출된 지 2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흉노의 서방 이동이 훈족의 서방 이동과 연관되며, 훈족의 명칭이 흉노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겨진다. 흉노의 인종에 관해서는 투르크계(系), 몽골계(系), 아리아계(系) 등의 설이 있는데, 몽골계와 투르크계가 섞여 있다는 설이 유력하다. 최근 흉노는 예니세이강 유역에 모여 살던 고대민족과 인종적 관련설이 있으나 이것도 확실하지는 않다. 국가형태는 연제, 호연(呼衍), 수복(須卜), 난(蘭), 구림(丘林) 등의 씨족으로 이루어진 흉노 부족을 지배층으로 하는 부족 연합체였으며, 선우의 지위는 연제씨족에게 세습되었고, 알씨(閼氏)라고 불린 황후는 원칙적으로 여타의 4씨족에서 나왔다. 국가를 구성하는 여러 부족의 족장은 1년에 세 번, 선우의 본거지에 모여 무속적(巫俗的)인 제사를 거행하였고, 동시에 국사를 의론하였다.


 

유목과 수렵생활로 양, 말 등의 가축을 방목하고, 하영지(夏營地)와 동영지(冬營地) 사이를 이동하며 천막식 원형(圓形) 가옥에 거주하였다. 예니세이강 상류의 미누신스크 분지에서 발굴된 한식(漢式) 궁전은 흉노에게 항복한 한나라 장군 이릉(李陵)의 것이라고 한다. 또한, P.K.코즐로프 일행이 노인울라(Noinula)에서 발굴한 귀족분묘는 기원 전후의 것인 듯한데 그 곳에서 스키트-시베리아계의 문물뿐만 아니라, 견직물, 칠기, 옥기 등의 중국제품, 이란계의 동식물 무늬와 인물상을 수놓은 모직물 등이 출토되어 흉노의 지배층에 대한 중국 ·서방문화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북흉노(北匈奴)

 

북흉노는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가 48년에 중국을 통일하자 흉노가 내분으로 양분(兩分)되었을 때 존재했던 흉노의 한 파였다. 한 파인 남흉노는 광무제에 항복하여 그 후에 위(魏), 진(晉), 5호16국(五胡十六國) 시대를 거치면서 모두 한족(漢族)과 융합·동화되었으나, 또 한 파인 몽골[蒙古] 지방의 북흉노는 이와 달리 행동하였다. 북흉노의 선비족(鮮卑族)은 87년 무렵부터 남흉노의 공격과 기근에 시달리면서 89년부터의 후한의 공격에 패하자 91년에 오르혼강 서쪽의 근거지를 버리고 이리[伊犂] 지방으로 옮겼다. 그리고 이후 약 반세기 동안 후한과 타림분지 제국(諸國)의 지배권을 놓고 싸웠다. 그 뒤 2세기 중엽에 서쪽의 키르기스 초원지대로 이동하면서 중국의 역사에서 사라졌다.

 

북흉노가 4세기에 유럽 일대를 휩쓴 훈의 원족(原族)이라는 것은 족명(族名)의 유사, 양자의 습속과 민족성의 일치, 흉노 서천(西遷)의 시기와 경로, 훈족의 유럽 출현시기의 일치 등으로 추론되어 왔다.

 

그 뒤 ‘위서(魏書)’ 서역전에 훈에 대한 사항이 흉노라는 이름으로 명기되었다는 점이 발견되었고, 고고학적으로도 유물이 유사하다는 점 등으로 흉노의 유럽 출현이 뒷받침되었다. 또한 훈·흉노가 같은 알타이계 언어의 사용자였다는 점과 훈 침입기에 러시아어(語)에 대량적으로 알타이어가 수입되었다는 점 등이 알려지면서 훈과 흉노의 동족설은 오늘날 학계의 다수설이 되었다.


 

에프탈족

 

에프탈은 중앙 아시아의 고대 북방유목민족으로 흉노의 일파로서, 5세기 중엽부터 7세기 중반까지 투르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을 통일하였다. Haytal, Hephtalites, 압달, 읍달 등으로도 표기하며 이란계 언어로 ‘강한 사람’을 의미한다. 에프탈 3세(재위 484~545년) 때에는 인근의 30여 개 부족을 지배할 만큼 위력이 강했다. 사산왕조 페르샤와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사산왕조에 협력하여 동방 로마령을 침공하였고 이로 인해 광대한 영토를 획득하였다. 나중에는 사산왕조와 돌궐(突厥)의 목간가한(木杆可汗) 연합군에게 침범 당하여 567년 멸망하였다. 그러나 그 민족은 8세기까지 존속되었는데, 그 후손이 현재 아프가니스탄 북동부의 바다흐샨 부근에 살고 있다. 이곳은 에프탈제국의 중심지였고 북쪽의 톈산[天山] 산맥 북부, 남쪽의 아프가니스탄과 북서인도의 펀자브, 동쪽의 동투르키스탄의 허톈, 서쪽의 사산왕조의 서쪽 영역인 호라산 지방에까지 제국의 영역이 미쳤다. 에프탈인은 유목생활을 하였으나 일부는 도시에 정주하였고, 일처다부의 풍습이 있었다. 고유한 문자는 없었고, 박트리아 지방에서 사용되던 그리스 문자로 이란계 언어를 기록하였다.

 


훈족(Hun)

 

훈족은 중앙아시아의 스텝지대(地帶)에 거주하였던 투르크계(系)의 유목기마민족이다. 중국 고대사에 나오는 흉노(匈奴)와도 관계가 있다고 보나, 한(漢)나라에 쫓겨 서쪽으로 간 흉노의 일부가 곧 훈족이라는 설에는 이론(異論)도 있다. 4세기에는 유럽으로 이동하여, 375년 흑해 북안(黑海 北岸)의 동(東)고트족을 무찔러 그 대부분을 지배하에 두고, 이어서 다뉴브강 하류의 서(西)고트족에 육박했다. 서고트족의 일부는 훈족의 압박을 피하여 동(東)로마에 이주하였는데, 이것을 게르만 민족 대이동의 발단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5세기 초의 루가왕 때에는 오늘날의 헝가리·트란실바니아 일대를 지배했고, 다음의 아틸라왕 때에는 전성기를 이루어, 주변의 게르만 제부족을 복속시켜 흑해 북안에서 라인강에 이르는 일대제국(一大帝國)을 수립했으나, 대제국으로서의 내부적 기틀이 잡혀 있지 않았다.

 

아틸라는 약탈을 일삼았고, 로마제국에 큰 위협을 주면서 다시 서진(西進), 갈리아에의 침입을 꾀하자 서로마의 장군 아이티우스는 451년 로마군(軍)과 게르만족의 연합군을 이끌고 북프랑스의 카탈라우눔의 평야에서 이를 무찔러 격퇴시켰다.


그러나 그 후에도 아틸라는 이탈리아 침입을 꾀하는 등 훈족의 위협은 계속되었으나, 453년 갑작스런 죽음으로 무적의 대제국(大帝國)도 급격히 분열·쇠퇴하여 훈족은 다뉴브강 하류지방으로 후퇴, 타민족과 혼혈·동화되어 소멸되었다.

 

흉노의 역사


흉노의 역사는 매우 장구하여, 일설에는 '그 시작이 기원전 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험윤(玁狁)이란 이름으로 중국을 위협하였다'고 한다. 이들의 활약은 시경(詩經)에 ‘우리가 집을 잃게 된 이유도, 우리가 잠시도 한가로이 쉴 수 없게 된 원인도 험윤 때문이다’ 란 글이 있을 정도로 중국인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흉노의 중심부는 현재 중국 내몽골 자치구에 있는 오르혼-셀렝가 강변과 고대 투르크인들이 신성한 지역으로 여기던 외투겐 평원의 카라품 사막과 오르도스 지역 사이였다.

 

기원전 4세기가 되자 흉노는 역사에 그 이름을 강렬하게 부각시켰다. 흉노는 연(燕)을 크게 위협하였고, 특히 진(秦)의 중심부와 인접한 관계로 진과는 번번이 충돌하였다. 중원의 여러 나라들이 제각기 장성을 쌓아 흉노의 침공을 막아보려 했지만 그들간의 전쟁으로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기원전 221년,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549년간에 걸친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역사상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자 흉노와 진과의 관계는 급변하였다. 시황제는 기원전 215년, 장군 몽염에게 30만의 대군을 주어 흉노를 공격하게 했고 여기에서 밀린 흉노는 오르도스를 버리고 고비 사막 이북으로 일시 후퇴하였다. 흉노를 몰아낸 시황제는 그들의 침공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전국시대에 각 나라들이 쌓았던 장성들을 전체적으로 보수하고 새로이 축조하여 만리장성(萬里長城)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기원전 210년 시황제가 죽자 진승과 오광의 난을 필두로 중국 각지는 반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으므로 자연히 흉노 문제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흉노의 지배자였던 두만 선우는 후궁의 아들을 총애하여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다. 그러나 장자인 모돈이 이에 반발하여 부자간의 권력 다툼을 벌여 두만을 살해하고 선우가 되었다. 모돈 선우는 국가를 정비하고 내정을 튼튼히 한 다음, 주변 부족들의 정복에 나서 동몽골과 만주 서부에서 강국으로 군림하던 동호(東胡)를 멸망시키고 예니세이강과 바이칼호 주변에 거주하던 정령족(丁零族)을 정복하였다. 다시 서쪽으로 진격하여 천산산맥과 감숙 지방에 할거하던 월지족(月氏族)을 격파해 멀리 중앙아시아로 내쫓았다. 남침도 병행하여 시황제에게 상실하였던 하남의 오르도스 지방을 회복하고, 중국 북부의 도시들도 탈취하였다.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하고 10여년 만인 기원전 210년에 사망하고 호해가 후임자로 등극했지만 곧 항우에게 패하고 진나라는 멸망하였다. 이때 흉노의 강병은 30만을 넘었고, 더구나 중국은 항우와 유방의 전쟁으로 인하여 흉노와 맞서 싸울 수가 없었다. 항우와 유방이 천하를 놓고 싸운 결과 유방이 승리하고 통일 중국인 한(漢)을 세웠다. 당시 북쪽에 있는 흉노는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강대국이었다.

 

유방은 기원전 202년 재위 5년에 비로소 황제라 칭하고 노관을 연(燕)왕으로 봉하였다. 그런데 기원전 201년 노관이 흉노에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유방은 흉노가 갓 탄생한 한나라에 큰 골칫거리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40만 명의 대군을 동원, 흉노의 모돈 선우를 공격하였다.

 

기원전 201~199년 사이에 벌어진 모돈 선우와 한 고조 유방 간의 전쟁은 모돈의 일방적인 승리로 종결되었다. 특히 기원전 200년의 백등산 전투에서 모돈 선우는 흉노 대군과 항복한 한의 군대까지 합쳐 무려 40만 대군으로 고조의 30만 대군을 7일간이나 포위하였다.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한군은 8만명의 사상자를 냈다. 결국 고조는 모돈 선우에게 매년 조공으로 곡물과 비단을 바치고 한의 공주를 모돈 선우에게 출가시키겠다는 실로 굴욕적인 조건으로 항복하였다.

 

<훈족선우에게 시집가는 왕소군>


 

당시 흉노와 한이 맺은 화친의 골자는

 

첫째,
rn한의 공주를 선우에게 의무적으로 출가시킨다. 이 관례는 문제(文帝, BC 179∼BC 157년) 때까지 계속되었다.


둘째,
rn한이 매년 술, 비단, 곡물을 포함한 일정량의 조공을 한다.


셋째,
rn한과 흉노가 형제맹약(兄弟盟約)을 맺어 동등한 지위를 가진다.


넷째,
rn만리장성을 경계로 양국이 서로 상대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


이 합의는 기원전 198년 가을, 중국 종실의 공주가 흉노에 도착함으로써 발효되었다. 특기할 사항은 양 조정(朝廷)에 왕위 변동이 있을 때마다 새로운 혼인으로 동맹을 갱신했다는 점이다. 또 중국이 흉노에 내는 조공 액수도 한과 흉노 사이의 역학 관계에 따라 수시로 바뀌었는데, 대체로 한의 조공액은 매년 늘어났다. 기원전 192년부터 135년까지 적어도 아홉 차례에 걸쳐 한이 흉노에 대한 조공액을 인상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한이 흉노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흉노는 몽골 중앙부인 상원(上原; 현재의 산서성 북부, 운중(雲中)에 상당하는 위치) 지역에 본영을 설치하여 선우가 직접 통치하고 좌현왕과 우현왕으로 나누어 각기 동서지역을 통치하게 했다. 상원 지역은 광활하면서도 비옥한 초원지역이자 동서남북 교통의 요충지다. 흉노를 비롯해 징기즈칸, 돌궐,
rn위그르 등이 모두 이 지역에 본영을 설치했다.


모돈 선우의 정복 전쟁은 더욱 확장되어 투르키스탄 북부의 월지와 오손을 복속시킴으로써 아시아 초원지대의 거의 모든 민족들이 흉노로 통일되었다. 흉노 제국의 경계는 동으로 한반도 북부, 북으로 바이칼호와 이르티시강, 서로는 아랄해, 남으로는 중국의 위수와 티벳고원, 그리고 카라코람 산맥을 잇는 거대한 영토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60년간 계속된 흉노와 한의 종속 관계는 무제의 즉위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한족이 이른바 ‘흉노 공포증’에서 벗어난 것은 기원전 141년 한나라 무제(武帝)가 즉위하면서부터다. 괄괄한 성미의 무제는 고조 유방 이후 60년간 지속된 굴욕적인 대(對)흉노 유화정책을 버리고 강경 대응에 나섰다.



기원전 133년, 무제는 마읍에 10만의 병사를 매복시켜 흉노의 군신 선우를 유인하려 했으나 실패하였고, 이어 두 대국은 곧바로 전쟁에 돌입했다. 무제는 기원전 129년부터 기원전 119년까지 10년 동안 여섯 차례에 걸쳐 위청과 곽거병 등으로 하여금 기병대를 이끌고 흉노를 공격하게 했다. 흉노와 한의 전쟁은 43년간이나 이어졌다. 하남지전(河南之戰), 하서지전(河西之戰), 막남지전(漠南之戰), 막북지전(漠北之戰)이란 명칭까지 붙여지며 곳곳에서 벌어지는 극한 양상의 전쟁은 결국 양자의 파멸로 끝나고 말았다. 경제와 문제가 물려준 한의 국력은 대흉노전을 위해 모두 소모되었으며, 무제는 군비의 각출에 혈안이 되었다. 이때 소금이나 쇠로 된 쟁기, 밥그릇에까지 세금을 매기려는 극악한 재정수탈정책이 등장했다. 이 염철론은 이후 국가전매제도의 효시 및 경전이 되었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악화되자 웬만한 범죄도 돈만 내면 해결될 정도로 한의 사회적 기강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기원전 87년 무제가 죽을 당시, 한의 인구는 초기의 4천만에서 2천만으로 감소해 있었다. 결국 무리한 대흉노전으로 인해 한은 멸망의 길을 밟게 되었다.

 

흉노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한과의 쉴새 없는 전쟁으로 수많은 전사자가 발생하였고 20만 명의 백성들이 포로가 되어 한으로 끌려갔으며, 흉노의 돈줄이 되어주던 중앙아시아의 도시 국가들이 한의 지배하에 들어감에 따라 흉노의 경제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뿐만 아니라 흉노의 약점을 보게 된 복속민들이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반란을 일으킨 복속민들은 바이칼호 주변의 정령족, 시라무렌 강변의 선비(흉노에게 멸망된 동호의 후손), 실크로드 북쪽의 오손 등이었다. 오손을 정벌하러 간 원정군은 엄청난 눈보라에 휩싸여 전투도 하기 전에 스스로 자멸하는 낭패를 보았고, 더욱이 기원전 68년에는 최악의 자연재해가 발생하여 백성과 가축 중 6~7할이 사망하는 극한상황까지 발생했다. 주변 속국들의 이탈과 거듭되는 자연 재해는 점차 흉노의 내부 갈등을 불러 일으켰다. 이 내부 갈등은 기원전 60년 허려권거 선우의 죽음을 기점으로 도기, 호게, 차려, 오차, 호한야 등 5명의 선우가 난립하는 내란 상태로 확대되어 끝없는 혼란으로 이어졌다. 기원전 56년에 네 선우가 차례로 패망하고 호한야 선우가 겨우 혼돈을 수습하였다. 그러나 도기의 사촌 동생인 서쪽의 휴순왕이 자립하여 규진 선우가 되고, 호한야의 형인 동쪽의 좌현왕 호도오사가 독립하여 질지 선우라 칭했다. 기원전 54년부터는 질지의 세력이 점차 강성해져 규진을 격파한 뒤 호한야를 공격하였다. 질지의 공격을 받은 호한야는 복속민들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도망가 한의 선제에게 항복하고 그의 신하가 되었다. 그 대가로 호한야는 중국 북서쪽 오원군의 변경 지대를 통치하였다. 이로써 기원전 55년경 흉노의 세력은 남북으로 양분되어 더욱 약화되었고, 중국에 대한 공격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호한야가 버리고 간 영토와 선우 왕정을 차지한 질지는 돌파구를 서쪽으로 잡았다. 기원전 51년, 질지 선우는 서진을 계속하여 실크로드의 오갈과 신장 위그르 지방의 견곤을 합병하였다. 이어 오손의 침공 위협에 시달리던 추강과 카자흐스탄 남부의 강거를 복속시킨 뒤, 오손을 공략하고 아랄해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정복하였다. 기원전 41년, 새로운 흉노제국의 수도를 추강과 탈라스 강변 사이의 견곤에 건설하고 성을 쌓아 방어에 임했다. 이로써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인도, 동서 유럽을 잇는 투르키스탄 지역에 투르크계 인종들이 본격적으로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더 나아가서 페르가나, 박트리아 지역까지 흉노에 속하였고, 질지 선우는 남서 경계가 멀리 아나톨리아 반도까지 연결되는 파르티아 왕국까지 공략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질지 선우의 웅대한 꿈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광대한 정복지에 대한 효과적인 통치체제가 채 정비되기 전에 한의 집요한 공격을 받았다. 강거와 오손의 지배권을 탈취한 한은 기원전 36년, 강거에 있던 질지 선우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흉노와 다른 복속 국가에서 차출된 한의 군사 7만은 탈라스 강변의 흉노 도성을 에워싸고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결국 도성이 완전히 파괴되고, 질지를 비롯한 흉노 지배층 1,518인이 살해되었고, 다른 흉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질지 선우의 죽음으로 새로운 거주지를 찾아 분산되었던 흉노는 더욱 서진하여 중앙아시아에서 자리를 잡고 소그디아나 동부와 드네프르 강변, 아랄해 동부 초원지대에서 국가를 형성하여 주변 유목민들을 병합하고, 서기 1세기에서 2세기 후반까지 동쪽에서 이동해온 북흉노 무리들을 흡수함으로써 강대한 세력을 이루었다.

 

약 2세기 동안 주변 국가들과 큰 마찰 없이 평화로운 삶을 누리던 흉노는 자연 기후의 변화와 생태계의 고갈, 그리고 350년경 북중국에서 쫓겨나 이동해온 우아르 흉노(에프탈족)의 압력으로 중앙아시아에서 더 서진해 유럽으로 들어갔다.


유럽에 훈족이 처음 나타난 시기는 서기 374년으로 이때부터 흉노는 훈족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훈족은 374년, 사령관 발라미르의 인솔하에 남러시아와 카프카스 일대에서 강력한 세력을 떨치던 알란족을 정복하였고, 같은 해 지금의 우크라이나를 차지하고 있던 동고트 왕국을 공격하였다. 당시 동고트 국왕이던 아르마나리크는 자결하였고 훈족은 후리문트를 왕으로 임명하여 동고트를 다스리게 하였다. 이로써 동고트족은 80년 동안 훈족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동아시아의 최강대국인 한을 위협하였던 훈족의 놀라운 기동성과 뛰어난 기마 전술은 서쪽의 유럽 땅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훈족은 드네프르강에서 서고트 군대를 격퇴시켰고, 이에 서고트 왕 아타나리크는 375년에 잔존 세력과 함께 로마제국에 보호를 구하여 돈강을 건너 지금의 불가리아 지방으로 이주하였다. 훈족의 계속된 공격과 막강한 군사력은 당시 어떠한 게르만계 민족도 대항할 수 없었고, 이렇게 되자 무수한 게르만계 민족들은 공포심에 사로잡혀 자기들의 영토에서 도망쳐 로마제국 영내로 이주해 왔다. 이것이 게르만족의 대이동이라 불린 민족 대이동의 효시였다. 그러나 이보다 먼저 로마제국은 사실상 분열되어 있었기에, 서고트족의 침입으로 분열은 더욱 촉진되어 드디어는 395년에 로마제국이 동서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훈족의 등장과 동유럽에서의 급격한 정복전쟁은 유럽인들에게 극도의 공포심을 불러 일으켰다.


 

진격을 거듭한 훈족은 정복지에서 차출된 고트족, 알란족, 게르만계의 타이팔리족으로 구성된 군대를 앞세우고 378년 봄에 투나강을 건너 로마군의 저항 없이 트라키아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로마의 영토에 첫발을 내디딘 훈족의 예비부대는 정찰 전위부대에 불과하였다. 같은 시기에 훈의 또 다른 부대는 헝가리 초원지대를 기습하고 있었다. 이즈음 훈족의 공격에 위협을 느낀 동유럽의 여러 민족들은 서서히 로마 영내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오스트리아 경작지에 거주하던 마르코만니족과 쿠아드족, 이란계 유목민인 사르마티아족, 트란실바니아의 서고트족들이 각각 다른 경로로 381년 로마 영내로 침입해 들어왔다. 다른 한편에서는 게르만계 종족들과 이란계 바쉬타르나족이 헝가리 서부에서 알프스 산맥을 따라 남하하여 이탈리아를 위협하였다.

 

훈족의 본격적인 동로마 침공은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하고 동서 로마가 분열되는 395년 봄이었다. 두 전선에 걸쳐 공격을 개시한 훈족은 발칸반도에서 트라키아 쪽으로, 또 다른 주력 부대는 카프카스에서 아나톨리아 고원 쪽으로 동로마를 압박해 들어갔다. 특히 아나톨리아 원정은 돈강 유역에 본부를 둔 훈제국의 동부군단이 주력이었으며 바시크와 쿠르시크, 두 사령관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원정은 군대의 규모나 주변국의 정세 재편에 미치는 영향으로 인해 동로마제국은 물론 사산조 페르시아제국에게도 극도의 긴장과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훈족의 정예부대는 에르주룸 지역에서 출발하여 카라수와 유프라테스 계곡을 지나 멜리테네(현재의 말라티아)와 킬리키아(현재의 추쿠로바)까지 진격했다. 그 곳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인 에데사(현 우르파)와 안타키아 성채를 한동안 점령한 후 시리아로 남하하여 티로스(현 수르)를 공략하였다. 그리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훈의 군대는 395년 가을에 다시 북으로 방향을 선회하여 중앙 아나톨리아에 도착하여 카이세리와 앙카라 평원의 카파도키아와 갈라티아를 유린하고, 그 곳에서 아제르바이잔-바쿠의 길을 따라 북쪽의 본거지로 귀환했다. 398년에 훈족의 군대가 재차 아나톨리아 원정을 감행했으나,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 1세는 아무런 대항도 하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훈족의 군대가 자국 영토를 유린하는 것을 방관해야만 했다. 


급속히 진행된 훈족의 아나톨리아 원정과 그에 따른 파괴와 살상에 대해서는, 특히 그 지역의 동방 기독교 교회 성직자들이 집필한 훈족에 대한 부정적인 설화와 무용담에 잘 나타나 있다.

한편, 서부 진영에서 훈족의 원정은 사령관 울딘이 지휘하고 있었다. 발라미르의 자손인 울딘은 후일 아틸라의 시대까지 지속되는 훈족의 대외 정책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의 정책의 기본은 동로마, 즉 비잔틴제국을 위협하면서 서로마와는 친선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는 동서 로마 관계를 차단시켜 훈에 위협적인 정치 세력의 등장을 막고, 보다 강력한 동로마를 효과적으로 견제하는 것을 제 일의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또 서로마를 협공하는 주변 민족들이 훈과 적대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훈은 서로마와 연합하여 그들을 공략하고자 했다. 동유럽에 산재해 있던 다양한 민족들을 압박하던 울딘이 투나 강변에 대군을 이끌고 나타나자 제2의 민족 이동이 시작되었다. 반달족과 훈족의 공격을 받아 서진한 서고트가 이탈리아 변경으로 몰려들었다. 반달족 출신 로마 장군 스틸리코는 402년 4월,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군을 힘겹게 패퇴시킴으로써 로마를 방어했으나, 계속되는 주변 민족들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 마침내 동고트의 라다가이수스 장군이 훈족에 쫓겨난 반달, 수에비, 쿠아드, 부르군트 등 여러 게르만계 민족들을 연합하여 로마에 대한 공략을 개시하였다. 이탈리아 전역이 유린당하고, 스틸리코 장군마저 파비아 전투에서 패하자 훈족이 개입하였다.

로마군과 울딘이 지휘하는 훈의 군대가 406년 가을 플로렌스 남부의 파에술레 전투에서 대승리를 거두고 라다가이수스를 처형함으로써 서로마는 위기에서 극적으로 구출되었다. 이로써 훈족의 위세가 온 유럽에 진동하였다. 반달족, 알란족, 수에비족, 사르마티아족들은 훈족의 위협을 피해 라인강을 넘어 갈리아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훈의 서부 유럽 경영은 이제 정치적, 군사적 장애 요소가 제거된 상태여서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울딘은 훈의 서부 지역을 통치한 왕이었다. 그는 404~405년, 그리고 409년에 투나강을 건너 강 남부 지역에 교두보를 확보함으로써, 비잔틴에 대한 훈의 위협을 계속하였다. 또 그리스 문헌에 따르면 울딘은 훈과의 평화 협상을 위해 파견된 트라키아 총독에게 태양이 뜨는 곳에서 태양이 지는 곳까지 모든 영토를 정복할 것임을 선언하면서 훈제국의 힘을 과시하였다.

410넌 울딘의 사망으로 훈제국의 통치는 카라톤에 위임되었다. 그는 412년에서 422년까지 약 10년 간 훈의 동부 지역 경영에 적극적이었다. 422년은 훈제국의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의 시작과 같은 해였다. 이 해에 훈 왕가의 네 형제인 루가, 문주크, 아이바르스, 옥타르가 서로 권력을 두고 쟁패하여 루가가 왕권을 획득하였다. 그리고 문주크가 사망함으로써 다른 두 형제는 각각 지역의 엘리그(Elig: 번왕)에 봉해졌다.

울딘의 정책을 계승한 루가는, 422년 비잔틴이 훈의 내분과 복속 민족의 반란을 획책하며 발칸 원정을 시도하자, 비잔틴군을 패퇴시켜 연간 금 350 리브레(1Libre= 약 450g)의 공납을 부과했다. 423년에는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408~450년)가 네 살의 나이로 등극한 서로마 황제 발렌티아누스 3세에 대항해 로마 침공을 개시했다. 동로마의 육해군이 이탈리아로 진격해 오자 서로마는 훈족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루가는 6만의 기병을 이끌고 직접 이탈리아 전선에 참가하였다. 이 때, 로마 원로원은 어린 황제를 폐하고 요하네스를 새 황제로 추대했다. 당시 35세이던 서로마의 장군 아에티우스는 서로마에서의 전쟁을 피해 재빨리 루가의 진영에 가담했다. 훈의 침공에 비잔틴 군대는 승산 없는 전쟁을 회피하고 퇴각함으로써, 로마는 폐허 대신 과중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다. 아에티우스는 432년에도 아프리카의 반달 왕 게이세릭과 전쟁을 벌인 그의 정적 보니파시우스의 공격을 피해 훈제국에 망명하였다. 이 같은 사실은 루가의 강력한 통치력과 함께 훈제국이 로마의 내정과 대외 정책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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