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突厥ㆍ돌궐)와 한국의 친연성은 무엇 때문인가?
타나토노트
2012-09-12 15:13:53 │ 조회 1853

모 신문에 기고되었던 조남제씨의 글을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위해 인용해 본다.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盧武鉉(노무현) 대통령이 방문했던 터키는 우리 민족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우방이다. 터키는 한자로 突厥(돌궐)이라고 표기한다. 몽골과 함께 중국에서 匈奴(흉노)라 칭하던 민족의 하나로, 6세기 중엽부터 8세기 중엽까지 몽골고원을 중심으로 활약했다. 우리 한민족과 같은 우랄 알타이어족이다. 고구려 전성기엔 글안, 여진(숙신)과 마찬가지로 일부는 고구려의 基層(기층)민중에 속했다.


 

돌궐은 고구려가 멸망한 후(668년), 고구려의 遺民(유민)을 많이 받아들이면서 우리 민족과 특별히 긴밀해졌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대부분의 서민들은 초기엔 唐(당), 후엔 신라의 지배를 받으면 한반도에서 살아갔으나, 귀족계급 등 중상류층 가운데 일부는 唐에 포로로 잡혀갔으며, 일부는 몽골, 글안, 돌궐 등 타민족에 섞여 살다가 682년 동돌궐이 올란바토르(현 몽고의 수도)에 「돌궐 제2제국」을 수립할 때, 여기에 참여했다. 그 숫자는 전 인구의 절반인 20만명이 넘었다는 설도 있다.


 

돌궐의 왕은 「單于(선우)」 또는 「可汗(가한)」이라고 불리며 그 아래에 左賢王(좌현왕), 右賢王(우현왕)이 있었다. 돌궐 제2제국의 單于는 고구려 遺民을 우대하여, 고구려 왕족의 일원이며 遺民의 수장인 高文簡(고문간)을 高麗王(고려왕)으로 봉했다. 왕은 둘 밖에 없는 것이 돌궐의 전통이었으나, 고구려 유민의 숫자가 너무 많으니 이들을 통치하기 쉽도록 王을 한명 더 늘려 고구려인을 앉힌 것이다. 돌궐은 특히 고구려 遺民 가운데 여성을 뽑아 종교의 首長(수장)인 제사장에 임명했다. 이를 탕구르, 또는 탱글리 라고 했다고 한다. 고조선시대 샤머니즘의 首長 호칭이 단군이었다는 설을 인정한다면 아마도 같은 계통의 단어가 아닐까 싶다.


 

돌궐은 7세기에 톤유크라는 사람이 중앙아시아 소그드語 계통의 문자를 만들어 역사를 기록했다. 고대 터키어로 기록된 돌궐 碑文(비문)이 몽골 오르혼江, 남시베리아 예니세이江 상류 및 서북 몽골지방에 세워져 있다. (특히 오르혼 江 비문은 1893년 덴마크의 언어학자 톰센이 현대 터어키어로 해독을 함으로써 터키의 기원에 대한 수많은 논쟁을 종식시켰다. 터키의 역사첵 가운데 고대사 부분을 보면 흉노와 돌궐족을 설명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자신들의 조상이 흉노, 돌궐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만약 碑文이 발견되지 않았거나 제대로 해석되지 않았다면 많은 터키인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현재의 터키에서 수천리 떨어진 몽골고원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당나라의 공격으로 세력이 약화된 돌궐은 8세기 무렵, 사라센제국의 용병으로 南下(남하)한다. 사라센은 이슬람교 창시자 모하메트의 후계자가 중동과 북아프리카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에 걸쳐 이룩한 대제국 이었다. 용병에 불과했던 돌궐은 11세기 무렵, 사라센제국을 멸망시키고 셀주크투르크 제국을 건설했다.


 

징기스칸의 몽골에 패해 그들의 지배를 받던 투르크는 13세기 말, 다시 오스만투르크를 세워 20세기 초반까지 7세기를 이어오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일어난 국민혁명으로 멸망했다. 동서양에 걸쳐 광대한 영토를 갖고 있던 터키는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편을 들다 독일이 패하는 바람에 많은 영토를 잃고 오늘날의 소국으로 전락했다.


 

터키는 과거 고구려의 기층민중이었으며, 「돌궐 제2제국」을 같이 한 우리 한민족에 대해 깊은 유대감과 함께 형제의식을 갖고 있다. 그래서 6ㆍ25때 북괴가 남침하자, 아시아에서는 가장 먼저, 미국,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군대(1만4936명, 전사 721명, 부상2147명)를 파견해 우리를 도왔던 것이다. 파병이 늦어지자, 터키의 고등학생들이 『왜 형제의 나라에 군대를 파견하지 않느냐』면서 데모를 벌였다는 말이 있다. 7세기 때부터 문자를 갖고 있는 그들은 역사를 통해 터키와 한민족과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대통령의 방문을 계기로 양국간의 경제 및 군사협력은 물론이고, 터키에 대한 깊은 연구가 행해졌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희망이다. 옛 터키어를 연구하면 잃어버린 우리의 과거 역사도 일부 그 속에서 찾아낼 수 있으리라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인용)



<太原은 현 산서성 중간이 아니라 원래 서남단이었음을 보여주는 중공역사지도>


터어키가 왜 그토록 형제국 이라며 한국에 민족적 애착을 갖는가에 대한 이유는 한국인들이 정확히 알지 못하는 특별한 이유 즉 한국고대사와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일본학자와 그 하수인인 조선인 학자가 왜곡해놓은 고대사를 보며 한반도 정도의 고대영토 인식 밖에 가지지 못하고 있다.


 

실제 唐書와 隋書의 내용을 보면 북쪽인 만주는 차치하고서라도 고구려의 남쪽 領地는 황하의 남쪽인 하남유역에 이르며 고구려가 패망한 이후에도 그 이전부터 고구려와 민족적으로 특별한 관계에 있었던 돌궐은 민족적으로, 그리고 정치적 적국인 唐에 대한 정치적 제어를 위하여 전 고구려 막리지이자 돌궐 首長의 사위이기도 했던 <高文簡>이 돌궐과 함께 당과의 전쟁을 벌이다 당의 이간책에 말려 돌궐이 분열되어 그 일부가 패하고 당에 귀속되는 과정에 대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는데 위 인용글에 대한 사실 확인을 위해 필자가 舊唐書를 찾아보니 돌궐(터어키의 前身)과 고구려의 관계를 알 수 있는 내용을 찾아내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구당서 권144 돌궐전(상) – 고구려 막리지 高文簡의 封地는 河南.


 

睿宗天祚,默啜又遣使請和親。制以宋王成器女為金山公主許嫁之。默啜乃遣其男楊我支特勒來朝,授右驍衛員外大將軍。俄而睿宗傳位,親竟不成。


 

예종(ad662-716)이 왕위를 이었다. 묵철이 시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송왕으로 제수하고 성기의 딸을 금산공주로 하여 허씨에 시집 보내었다. 묵철은 그의 아들 양아지특륵을 조정에 보내니 우효위원외대장군으로 제수하였다.


 

初,默啜景雲中率兵西擊娑葛,破滅之。契丹及奚,自神功之後,常受其征役,其地東西萬餘裡,控弦四十萬,自頡利之後最為強盛。自恃兵威,虐用其眾。默啜既老,部落漸多逃散。開元二年,遣其子移涅可汗及同俄特勒、妹婿火拔頡利發石阿失畢率精騎圍逼北庭。右驍衛將軍郭虔瓘嬰城固守,俄而出兵擒同俄特勒於城下,斬之。虜因退縮,火拔懼不敢歸,攜其妻來奔,制授左衛大將軍,封燕北郡王,封其妻為金山公主,賜宅一區,奴婢十人,馬十匹,物千段。


明年,十姓部落左廂五咄六啜、右廂五弩失畢五俟斤及子婿高麗莫離支高文簡、睟跌都督崿跌思泰等各率其眾,相繼來降,前後總萬余帳。制令居河南之舊地。授高文簡左衛員外大將軍,封遼西郡王;睟跌思泰為特進、右衛員 外大將軍兼睟跌都督,封樓煩郡公。自余首領,封拜賜物各有差。默啜女婿阿史德胡祿,俄又歸朝,授以特進。其秋,默啜與九姓首領阿布思等戰於磧北。九姓大潰,人畜多死,阿布思率眾來降。


 

(상략)--- 685년 십성부락 좌상오 돌육철, 우상오 노실필오사근과 그의 사위 고려 막리지<고문간>, 협질도독 악질사태 등이 그 무리를 이끌고 투항해 들어왔다. 약 일만의 군막 정도 되었다.그들을 하남의 옛 땅에 기거하게 하였다. 고문간은 좌위원외대장군 요서군왕에 봉했으며 협질사태는 특별히 진급시켜 위원외대장군겸 악질도독으로 하여 누번군공에 봉했다.----(하략)

 

 

여기서 우리는 고구려의 영토가 하남에 이르렀다는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고 고구려가 한반도 이북과 만주지역 정도에 존재했었다는 왜곡된 기존의 역사적 내용을 계속하여 주장하려면 구당서의 이러한 내용을 부정하는 근거를 내놓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고구려의 막리지의 옛 땅이 하남이었다는 사실인것이다 이래도 구당서에 기록된 하남이 경기도 河南인가?. 또한 정도 고구려 패망 이후 8세기 정도 부터 지명변경이 있었음을 예측할수 있습니다, 즉 太原이란 말그대로 큰 평원을 이야기함인데 지명적으로 산서성 남서부 汾河와 黃河가 만나는 광대한 평원을 고대에는 太原이라 했으며 이러한 근거는 윗 지도에서 그대로 보여주고있다. 또한 遼가 동으로 이동하여 舊遼東이 遼西로 바뀌어 칭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구려의 막리지<고문간>이 바로 돌궐로 넘어가 흉노의 일파인 돌궐을 이끈 터키고대사의 비밀인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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