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마구잡이 백두산 개발, 그곳에 가보니…
타나토노트
2012-11-23 09:55:31 │ 조회 1102




중국, 마구잡이 백두산 개발, 그곳에 가보니…




[압록·두만에서 바라본 북한의 오늘]




황재옥 (사)평화협력원 인권·평화센터 소장






지난 8월 초순 한국의 북한전문가들이 8박9일 동안 압록강 서쪽 끝 단동(丹東)에서 두만강 동쪽 끝 방천(防川)까지 북·중 국경
1376.5㎞, 3000리가 넘는 거리를 답사하면서 강 건너 북한 땅의 사정을 보고 듣고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이번 답사는 북한
전문가들이 그 동안 문헌자료와 현장경험을 통해서 축적해온 지식과 눈앞의 현실을 대조하고 검증하는 과정이었다는 점에서 답사단의 분석과 평가는
정보와 자료로서 가치가 적지 않습니다. <프레시안>은 답사단의 일원이었던 황재옥 박사가 이번 현장답사에서 보고 듣고 느낀 내용들을
정리한 글을 게재합니다. <편집자>


[다섯째날 오전] 백두산 천지, 발해
유적


창바이의 새벽시장

오늘은 백두산에 오른다. 천지를 제대로 볼 수 있는 확률은 20~30%라고
하는데, 천지 주변의 기상변화가 오후에 특히 심하기 때문에 우리는 잠을 줄여서라도 이른 아침에 떠나기로 했다. 백두산에 오르는 코스는 동파,
서파, 남파, 북파 4개가 있는데, 북한 쪽에서 올라가는 동파를 제외하고는 모두
중국 쪽에 있다. 우리는 오늘 남파 코스로 백두산에 오를 예정이다. 내일은 북파 쪽으로 한 번 더 백두산에 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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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바이 새벽시장 ⓒ황재옥










백두산 산상에 기상변화가 일어나기 전인 오전
일찍 천지에 당도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른 아침 출발해야 했다.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떠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호텔 가까이에 있는
창바이(長白)
새벽시장에서 아침거리를 준비하기로 했다. 5시에 일어나 5분 정도 떨어진 시장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임에도 벌써
많은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팔면서 시장은 활기를 띠고 있었다. 조선족자치현으로서 조선족들이 많이 사는 도시여서 그런지 창바이 새벽시장에는 중국적인
먹거리와 함께 한국적인 먹거리도 많이 볼 수 있었다. 한국에서 볼 수 있는 채소와 과일, 떡 등이 눈에 띄었다. 가지나 오이 토마토 옥수수는
한국 것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크기는 조금 커 보였다. 단지 수박은 노지수박인지 크기가 작았다. 절임 반찬과
김치 등도 보이고, 밀떡과 찐빵 같은 것도 보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타지(他地)에서의 장구경은 신나고
재미있었다. 새벽시장에서 우리는 푸짐하게 아침거리를 장만하여 6시에 호텔을 출발했다. 창바이시도 해발 754m의 고지대인데, 백두산은 해발
2750m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약 2000m를 더 높이 올라가야 했다.


백두산 이름의
유래


백두산(白頭山)이란 지명은 하얀 화산재로 덮인 백두산 정상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알프스의 몽블랑(Mont
Blanc)처럼 흰 눈이 쌓여 있어서 백두산이란 이름이 붙여진 줄 알았는데 '눈'이 아닌 '화산재'라는 사실을 이번에 비로소 알게 되었다.
한국의 모든 산들은 백두산에서 지리산에 이르는 백두대간(白頭大幹)으로부터 뻗어 나왔다. 그래서 백두산은 예로부터 우리 민족의 성산(聖山)으로
숭배되어 왔다.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정신적 고향이며 뿌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백두산은 고조선 단군신화의 근거지이기도 하다. 고구려의
산악숭배 신앙이 통일신라로 이어지고, 이후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민족의 성산(聖山), 영산(靈山)으로 여겨져 온 산이
백두산이다. 백두산은 그만큼 상징성이 큰 우리 민족의 산인 것이다.


우리가 도착한 시각, 남파 쪽 백두산 입구는 우리 외에 다른
관광객이 없었다. 백두산의 위용만큼이나 큰 산문 입구에는 백두산의 중국 이름인 창바이산(長白山)이라고 쓴 현판이 높다랗게 걸려 있었다. 입구 쪽
기념품을 파는 건물도
얼마나 높게 지어졌던지, 사람 키의 4~5배는 되는 듯 했다. 그 건물을 바라보고 오른쪽으로 압록강 상류가
흐르고 있었는데, 상류라서 강이라기보다는 실개천에 가까울 정도였다. 그 실개천 가에는 국경임을 알리는 듯한 철조망이 세워져 있었으나, 북쪽에는
그나마 철조망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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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경임을 표시한 철조망 ⓒ황재옥










개별 차량 운행이 금지되어 있어서 입구에서 천지 쪽 정상을 오가는 버스를 타고 가야만 했다. 버스비는 2011년보다 30위안 올랐다고 한다. 입장료와 버스비를 합쳐 1인당
83위안(한국 돈 4만 원 정도)이 들었다. 중국 쪽으로 백두산을 찾는 관광객 수가 2008년 88만 명에서 2011년 142만 명으로
급증했다고 하며, 이중 중국 관광객이 90%라고 한다. 그러니 백두산 관광으로 돈을 버는 것은 북한이 아니라, 창바이산이란 이름으로 돈을 벌고
있는 중국이었다.


맑게 갠 하늘 아래 하늘보다 더 파란 천지(天池)

남파 산문의 매표소가 열리자마자 표를
산 우리는 가장 먼저
미니버스를 타고 남파 길을 따라 정상으로 향했다. 우리가 가장 먼저 미니버스를 탈 수 있었던 것은 다른 관광객들이 도착하기 전이라는 사실을, 천지가 내려다보이는 남파 쪽 정상에
오른 후에야 알게 되었다. 산문에서 천지 근처까지는 약 20~30분 정도 소요되었다. 올라가는 길이 가파르고 커브도 심해서 이 길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면 운전하는 것이 매우 위험해 보였다. 차 안에서 손잡이를 잡지 않으면 옆으로 심하게 기울기도 하고 의자에서 미끄러져 떨어질
정도였다. 이리저리 흔들거려도 창밖의 절경을 구경한다고 우리는 정신이 없었다. 참으로 다양한 모습을 가진 백두산이었다. 끝이 없이 너른 자작
나무 군락이 펼쳐지는가 하면, 깎아지른 듯한 절벽, 그리고 영화'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보았던 에델바이스 같은
고산 야생화가 만개한 들판도 보였다. 하늘과 백두산의 끝이 맞닿아 있어 백두산 끝이 어디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러더니 홀연히 눈처럼 하얀
화산재로 덮인 산 정상들이 눈에 들어왔다. 백두산의 '백두'가 드디어 내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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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산 모습 ⓒ황재옥










백두산에 올라갔다가 날씨가 나빠서 천지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되면, 우스갯소리로 일행 중 행실이 좋지 않은 사람이 하나 끼어 있어서 그리된다는 얘기를 했다. 우리 일행 중에는 행실이 바르지
않은 분이 하나도 없었던지 해맑고 높은 하늘을 볼 수 있었다. 최소한 천지가 구름에 가리거나, 한두 시간 내에 비가 내릴 확률은 전혀 없어
보였다. 천지가 가까웠는지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 이제 조금만 올라가면 천지를 보게 되는 것이다.


천지 쪽으로 걸어
올라가는 길에는 작은 화산석들이 널려 있었다. 경치에 도취되어 멀리 보거나
사진 찍느라 발밑을 보지 않고 걷다가는 화산석 돌멩이에 미끄러지기 십상이었다. 실제로 필자도 사진 찍으려고 구도
잡으면서 걷다가 화산석 돌멩이를 밟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때 든 멍이 제법 오래갔다. 백두산에서 넘어진 것도 기념이라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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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지를 향해 올라가는 길 ⓒ황재옥










나무가 없는 평평한 산 정상의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올라가니 하늘보다 더 파란 천지가 신비
스런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이른 시간이라 우리 외에는 다른 관광객들이 없어서, 우리는 멋진 사진도 마음대로
찍을 수 있었다. 천지의 기운을 받아가기 위해서 양팔을 높이 들어 심호흡하기도 했다. 우리가 천지를 보고 느끼는 감동은 중국인들과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천지 앞에서의 한국인과 중국인의 모습에서 다른 점을 느꼈다면 과장일까? 천지를 바라보면서 필자는 감동을 넘어 외경심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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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산 천지 ⓒ황재옥










천지가 잘 내려다보이는 지점에 북ㆍ중 국경을
알리는 북ㆍ중간 경계비가 서 있었고 돌기둥과 쇠사슬로 경계표시가 되어 있었다. 경계비가 서 있는 곳은 관면봉(2528m)과 와호봉(2566m)
사이 중간 지점인 듯했다. 경계비 앞면에는 '中國'이라 쓰여 있고, 뒷면에는 '조선'이라고 쓰여 있었다. 어린아이도 쉽게 넘을 수 있는 높이의
쇠사슬이 달랑 한 줄 처져 있었는데, 그 너머가 북한 땅이었다. 사진 찍으려고 무심코 쇠사슬을 넘어 발을 디디면 '월북'이 되는 셈이다.
그러니까 남파는 아주 민감한 북ㆍ중 접경지역을 따라 백두산에 오르는 코스였다.


천지를 바라보는 위치에서 오른쪽으로 백두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즉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인 장군봉(2749m)이
보였다. 원래 백두봉이었고, 이것 때문에 백두산이라고 불리는데 요즘 북한 지도에는 그 봉우리를 장군봉으로 표시하고 있다. 중국 측 자료에서 본
기억이 있는데, 1960년대 초 북‧중 국경 획정 과정에서 백두산의 최고봉인 백두봉이 북한 것으로 확정된 것이 '김일성 장군'의 덕분이라는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후 장군봉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우아하게 천지와 백두봉을 바라보면서 감동과 외경심마저 느끼고 있는데, 갑자기
주변이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중국인 관광객들이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조용히 천지를 감상하는 한국인들 틈에 시끌벅적하게 중국인 관광객들이
분주하게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우리는 오늘 가장 먼저 도착해서 한 시간 가까이 하늘보다 더 파랗고 신비한 천지를 보았으며, 눈처럼 하얀
화산재로 덮여 있는 백두봉(장군봉)을 보았다. 내려갈 시간이 된 듯하여 중국인 관광객들에게 자리를 내 주었다. 그런데 우리가 자리를 뜨려는 순간
구름이 몰려오면서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백두산 정상의 기상변화가 변화무쌍하다더니 시간에 따라 기상이 변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다.


중국은 2007년 1월 말 창춘(長春)에서 개최된 동계아시안게임 때 창바이산(長白山) 즉 백두산에서 올림픽 성화를
채화함으로써 백두산이 중국의 산임을 전
세계에 알렸다. 중국은 백두산(창바이산)을 중국 10대 명산 중 하나로 지정하고, 창바이산이 청나라 만주족의
영산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은 창바이산을 세계유산으로 지정하려고 단독 신청하였다. 백두산을 창바이산으로 완전히 탈바꿈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중국의 민간기업 컨소시엄은 아시아 최대 스키장을 포함한 대형 리조트를 창바이산에 건설해서 동북아 최대관광지로 개발하려는 계획을 추진 중이라고 한다. 역사, 정치, 경제에서 문화로까지 소수민족을
융합해서 하나의 중국으로 만들려는 중국의 야심찬 계획이 백두산의 무분별한 개발과 관광객 유치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성산이자
천혜의 자연경관이 심하게 훼손될까 염려스러웠다.


다시 버스를 타고 산문 입구까지 내려왔다. 우리가 타고 온 차량이 있는 주차장에는 아침에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관광버스들이 그새 많이 주차되어 있었다. 주차장 옆에는 교량
건설 중인지
도로 건설 중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었다. 백두산 관광 개발을 위한 인프라 건설의 일환일 것이다.

창바이로 돌아올
때는 아침에 오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왔다. 돌아오는 길옆 왼쪽으로 압록강 상류가 흐르고 있었다. 산문 입구 쪽에서 실개천이던 물줄기가 제법
넓어졌다. 압록강이 국경선임을 실감케 하는 북한군 초소와 망루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그리고 뙈기밭으로 보이는 곳에 움막을 지어 놓고 무언가를
감시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탈북을 감시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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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록강 상류 북한군 초소 ⓒ황재옥










움막 같은 집들과 군부대 건물이
있고, 압록강 상류 물가에서 미역감는 아이들과 빨래하는 아낙네들도 보였다. 군인들과 아이들, 그리고 아낙네들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최전방
국경지역에 근무하는 군인들은 가족단위로 배치를 받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발해 유적과 동북공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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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유적 영광탑 ⓒ황재옥









백두산에서 내려와 다시 창바이로 들어서면서 우리는
곧바로 발해 유적 영광탑(靈光塔)이 있는 산 중턱으로 갔다. 주택들이 옹기종기 몰려 있는 곳에 차 한 대가 간신이 지날 수 있는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올라가니 발해유적인 영광탑이 있었다. 진입로는 신통치 않았지만, 탑 주변은 관광지로 개발하려는 듯 잔디밭과 주차장을 조성하고 있었다. 탑
주변 잔디밭과 주차장이 관광지 개발을 위한 것이라면 응당 영광탑 자체부터 관리하는 것이 순서일 텐데, 영광탐의 탑신은 약 15도 정도 기울어져
있었다. 피사의 사탑(斜塔)처럼 기울어진 채 서 있었다.


중국의 중학교 교과서에는 발해가 말갈족이 세운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라고 쓰여 있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영광탑을 소개하는 비문에는 '이 탑이 당나라의 탑과 같으며 당나라의 풍격을 지니고 있다. 이 탑은 발해시기의 문화를
연구하는 데 있어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쓰여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근거가 좀 박약하다고 할 수 있다. 우선 높이
13미터 5층짜리 영광탑은 중국식인 전탑(塼塔)이 아니라 모전석탑(模塼石塔: 돌을
벽돌 모양으로 잘게 잘라서 쌓아올린 석탑)이었기 때문이다. 경주의 분황사 5층 모전석탑(현재는 3층만 남아
있음)과 같은 방식으로 쌓아 올린 탑이었다. 중국 특유의 전탑(塼塔: 진흙으로 벽돌을 구워 쌓아 올린 탑)과 외형은 비슷하지만 재료가 완전히
다르다는 점에서 '이 탑이 당나라의 탑과 같다느니 당나라의 풍격을 지니고 있다느니'하는 비문의 설명은 옳다고 할 수 없었다.


필자
같은 역사학과 고고학의 문외한이 볼 때도 영광탑이 '발해시대의 문화를 연구하는데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비문 내용은 맞는 얘기 같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발해문화의 뿌리가 어느 나라 쪽으로 연결되었느냐인데, 물론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당나라 문물이 당연히 발해에도 많이
들어왔을 것이다. 그러나 경주 분황사의 5층 모전석탑과 창바이 5층 모전석탑(영광탑)의 공통점을 보면서, 발해시대의
건축양식과 관련된 대외 문화교류의 방향은 당나라보다는 오히려 신라 쪽이지 않나 싶다.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보다는 신라 수도 경주가
지리적으로 훨씬 가깝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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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광탑을 설명하는 비문 ⓒ황재옥










요컨대 영광탑의 재료 자체가 중국식
탑과는 확연하게 다른데도 불구하고, 외형만 가지고 발해 역사와 문화재를 중국의 일부로 규정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중국을 통해
불교를 전수받은 동아시아 지역의 탑들도 모두 중국 것이라고 하는 말과 같은 것이다.


중국은 2002년 시작한 동북공정이 2007년
끝났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광개토태왕비를 보고 영광탑을 보고 필자는 동북공정은 동북3성을 통해 아직도 진행 중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2004년 고구려유적에 이어 발해유적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는 움직임이 있고, 발해를 중국 속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63년 저우언라이 총리가 북한학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발해는 조선족의 한 가지이고, 독립된 국가였다'고 말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史實)이다. 일국의 총리가 근거 없는 말을 그것도 북한학자들 앞에서 할 리가 없지 않겠는가. 시대와 필요에 따라 정책의 변화는 있을 수
있어도 역사적 사실은 왜곡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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