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석장리에서 한반도 구석기시대 열렸다
타나토노트
2015-02-10 21:30:28 │ 조회 1219

 

 

공주 석장리 유적지 공주시 제공 

 

 

인류의 4대 문명은 모두 강을 중심으로 하고 있고 다른 문명들과는 다른 무엇이 있다. 이를 토대로 4대 문명들은 강력한 제국을 탄생시켰고 모두 역사에서 큰 획을 그었다. 인류역사의 시발점이 4대 문명이라는 일각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반만년이라는 역사를 가진 한반도 역시 4대 문명 못지않게 나름의 문화를 가졌다. 특히 금강을 중심으로 생긴 구석기 때의 충남지역 인류들은 한반도 다른 지역의 문명보다 크게 발전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부족을 형성하고 훗날 백제라는 국가의 발판을 마련하는 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구석기 때 충남지역은 어떤 생활을 해왔을까. 

 

 

 

 

 공주 석장리에서 발굴된 석기시대의 유물들. 석장리는 우리나라 최초로 발굴작업이 시작된 유적지이다.  

석장리박물관 홈피사진 

 

 

 ◆한반도 구석기시대의 기원인 공주 석장리

  

 사적 제334호로 지정된 석장리 유적은 공주를 관통하는 금강 북안의 해발 13∼17m의 하안단구에 위치하고 있다. 

 

해당 유적이 중요한 이유는 남한에서 가장 먼저 조사가 실시됐고 이를 통해 우리나라에도 구석기시대가 존재했다는 증거가 됐기 때문이다. 고대문명들은 강을 중심으로 형성돼 왔던 만큼 금강유역에도 구석기시대의 문명이 있을 것으로 추측은 됐다. 하지만 해방 전까지 일본인 학자들은 유구한 한민족의 역사를 감추기 위해 우리나라 구석기 문화를 부정하고 존재하지 않는 허구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공주 석장리 유적이 발견되면서 이들의 거짓은 탄로 나고 말았다. 

 

해당 유적이 본격 조사된 시기는 지난 1964년으로 1990년대 초까지 모두 열두 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진행됐다. 조사 결과 해당 유적은 27개 지층으로 구성됐고 그 중 13개 층에서 유물이 확인됐다. 

전기 문화층(1∼6층)에서는 대형 석기가 많이 출토됐고 중기 문화층(7∼9층)에서는 격지를 이용 긁개류가 많이 나왔으나 인공 유물인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연구가 더 필요한 상황이다.  

 

후기 문화층(10∼12층)에서는 쐐기형몸돌, 새기개 등 후기 구석기시대 유물상을 보여주는 소형 석기가 많이 출토됐다. 

 

암질은 대부분이 규질니암(硅質泥岩) 계통이며 석영이나 흑요석재(黑曜石材)도 사용됐다. 맨 위층에서는 기둥자리와 불 땐 흔적이 있는 집자리도 확인됐다. 맨 위층을 연대 측정한 결과 3만 년, 혹 5만 년 전으로 확인됐는데 이는 유적에서 발견된 숯의 시료분석 결과에 의한 것이어서 기원 더 이전으로 예상할 수 있다. 

 

땅바닥과 벽에는 이들이 직접 새긴 것으로 보이는 고래상과 물고기상이 나왔는데 나름 형태를 갖 것으로 보아 예술성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집터 안에서 발견된 머리털은 지금 인간의 머리카락과 같아 우리나라 인류의 역사는 공주 석장리에서 시작됐다고 보는 것이 보통의 정설이다. 

 

조사를 통해 공주 석장리에 거주했던 인류는 집을 짓고 불을 피우며 벽화에 그림을 새기며 사 등 당시로선 최고의 문화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이 조사를 통해 구석기 시대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자연스레 많은 연구자가 양성되는 등 다른 순기능들도 나타났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인 청동검. 부여 송국리는 청동기시대를 이끈 지역 중 하나이다. 부여국립박물관 홈피사진

  

 ◆농업을 통해 청동기시대를 이끈 부여 송국리

 

공주 석장리가 한반도의 구석기시대를 이끌었다면 이후 시대인 청동기시절은 부여 송국리가 선도했다. 

당시 송국리는 낮은 구릉과 대지 위에 100여 기 이상의 집터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집터는 평면 형태에 따라 둥근 것과 긴 네모꼴이 주를 이뤘다. 둥근 집터는 30∼150㎝ 깊이로 땅을 파서 만들었으며 한쪽 벽을 얕게 파서 문을 만든 듯하다. 화덕자리가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다수의 저장용 구덩이가 발견됐다. 바닥 중앙에 1m 내외의 긴 타원형 구덩이를 파고 그 구덩이 안에 몇 개 둥근 구덩이를 만들었다. 

 

네모꼴 집터는 30㎝ 미만으로 땅을 판 반움집이나 지상 위에 지은 집에 가까운 것으로 기둥구멍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주춧돌이 있는 발달된 집 형태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집터 안에서는 토기와 석기가 많이 출토됐다. 토기는 무문토기와 붉은 토기(홍도), 검은 간토기(흑도)가 나왔다. 무문토기는 납작한 밑, 긴 달걀형의 몸체, 목이 없이 아가리가 밖으로 약간 꺾인 모습을 했다.  

 

돌칼, 돌화살촉, 방추차, 돌도끼를 비롯해 다양한 석기들도 출토됐고 동도끼 거푸집이 출토되는가 하면 특히 환호와 목책렬, 많은 양의 불탄 쌀과 벽체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판자가 불탄 채로 나오기도 해 전쟁이 빈번했던 것으로 예상된다. 

 

이 모든 것을 종합했을 때 송국리에 거주했던 인류는 벼농사를 짓고 마제석기와 토기, 그리고 청동기를 만들어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국가 조직’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성이나 해자형태의 방어시설 등이 발견된 것으로 미뤄볼 때 송국리 유적의 인류는 전쟁을 벌여 다른 지역과 생존경쟁을 치 것으로 보인다.  

 

공주의 석장리와 부여의 송국리라는 문명이 충남지역에 존재하면서 동아시아의 중심으로 성장했던 백제가 이들 지역을 수도로 사용했던 점은 어쩌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초기 철기시대의 청동거울. 철기는 육로로는 한반도 북쪽, 해로로는 서해안지역으로 유입됐다. 충남지역에는 당진 등이 초기 철기시대를 이끌었다. 부여국립박물관 홈피사진

 

 

◆중국에서 유입된 철기로 발전한 당진 소소리 

 

 전설에 따르면 고대 중국에서 용족이라는 민족의 우두머리인 헌원(軒轅)이 고조선을 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탁록현(현 허베이성)으로 진격했고 고조선의 왕인 치우천황이 철을 통해 창과 방패 만들어 이들을 격퇴했다고 한다.  

 

비록 전설이긴 하지만 철기가 제일 먼저 생산된 중국 내 지역은 당시 고조선이 위치했던 동북해안지역이어서 마냥 전설로만 치부하긴 힘들다. 이 지역에서 시작된 철기문화는 육로를 통해선 북쪽으로, 해로를 통해선 서쪽으로 한반도에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중국과 서해를 끼고 있는 충남의 서해안지역은 한반도 북부지역과 함께 초기 철기시대를 이끌었다. 초기 철기시대에서 충남지역 중 가장 눈여겨 볼만한 곳은 당진 소소리이다. 

 

유적은 당진 합덕면에 위치했고 소소리 유적을 중심으로 반경 20㎞ 내외에 삽교천 동안의 아산 궁평리(宮坪里) 유적을 비롯해서 남성리(南城里), 백암리(白岩里), 예산 동서리(東西里) 등의 한국식동검(韓國式銅劍) 혹은 세형동검(細形銅劍) 관계 유적이 있는 것으로 봐 이곳이 초기 철기시대 때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청동기시대의 유물과 초기 철기시대의 유물이 함께 나왔는데 대표적인 유물이 세형동검 동꺾창. 세문경, 쇠도끼, 쇠끌 등이다. 특히 거울인 세문경은 초기 철기시대의 유물 중 대표적이다. 

 

소소리 유적은 유구 상태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유물의 성격으로 보아 얕은 구릉에 단독으로 조성된 토광돌덧널무덤 내에 나무를 안치한 무덤일 가능성이 많다.

 

세형동검, 세문경 등과 함께 발견되는 주조철기는 중국 동북부와 청천강 이북의 한반도 지역에서 확인되는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세죽리-연화보(細竹里-蓮花堡) 유형의 문화 요소가 한반도 서남부지역에 들어왔음을 보여주는 유적인 점에서 의미가 깊다.  

 

이 외에도 서해안 지역인 홍성 등에서도 철기시대의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고 이곳을 중심으로 삼한(三韓) 중 하나인 마한(馬韓)이 생겨 백제가 건국되기 이전까지 해당 지역에 터를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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